여승이 조주에게
“저.....무엇이 음밀(陰密)한 것입니까?”
여승의 가슴 속으로 손을 쑥 넣고는 “바로 이거다”하였다.
“어머머 이러실 줄 몰랐어요”
“뭘 모른단 말인가?”
“엉큼하고 더러워요”
“에이 못된 년. 바로 네가 엉큼하고 더러운 년이여”
“너의 가슴이 더러우냐?”
“내 손이 더러우냐?”
마음이 깨끗하면 일체가 깨끗하며
마음이 부정하면 일체가 부정하다.(출처=주역의 멋)
참으로 어안이 벙벙한 이야기 같으나 심정만정(心淨萬定)의 가르침으로 전해진다. 만일 목사님께서 같은 방법의 가르침과 설교를 했다면, 과연 어떤 반응들이 발생 되었을까? 모르긴 해도 미디어 등의 모든 매체들을 동원한 사람들의 아우성이 하늘을 찌를 것이다.
왜 일까? 무엇이 다르기 때문일까?
스님은 어떠한 방법도 큰 가르침이 되는데 목사님은 그리하면 안 된단다. 스님은 여인내 가슴에 손을 넣어도 큰 가르침인데 목사님은 위로의 포옹만 해도 부정한 자란다. 스님은 모욕적인 것 같은 말을 해도 큰 가르침을 주기 위함인데 목사님이 그러한 투의 설교를 하면 상스럽다고 한다. 스님은 여인의 마음이 부정하다 해도 큰 가르침인데 목사님은 그리하면 명예훼손이 된단다.
스님은 자기생각을 표현해도 큰 가르침이 되는데 목사님은 하나님의 뜻을 전해도 “개그”나 “코미디”만큼도 귀담 아 들으려 하지 않는 것일까?
도심에 사찰을 건축할 때는 현수막 한 장 보이지 않는데, 교회를 건축한다면 온 세상이 뒤집히는 온갖 비방과 욕설이 난무하는 것일까?
스님들은 몽둥이에 도끼를 들고 심지어 불까지 지르며 싸워도, 목사님들은 욕설만 해도 온 세상이 뒤집어 지는 양 소란이 일어난다. 또한 “성철” 스님, “김수환”추기경, 이태석 신부 등은 훌륭한 인물들이하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손양원” 목사님 등에 비교 될 만할까? 그도 아니면 무엇 때문일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삶으로 구현해 낼 수 있도록 성령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를 기도하며 몸부림치지만 인간의 본성이 잔존하기에 바람직하지 못한 일들이 발생 될 때도 있다고 자위(自慰)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그러한 논리가 우리에게 정당성을 부여한다고 볼 수는 없다. 따라서 목사들의 문제에 세상이 뒤집히는 사건인양 침소봉대 되고 있다는 등 염려, 불평, 비난 등의 봇물을 쏟아 낼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면, 나 한사람으로 인하여 교회 전체를 욕되지 않도록 하며, 좀 더 숙고(熟考)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은혜생활, 하나님의 수종자들로 더욱 거룩한 곧 성도다운 삶 등을 누리기 위한 자성(自省)을 하자.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7:21-23).
한국장로교신학 학장•본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