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총연합회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가 변승우 목사에 대해 “이단성 없음”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 결론은 임원회를 통과했다. 실행위원회도 무사히 통과돼 변승우 목사는 이단의 올무에서 벗어날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변승우 목사의 이단 해지를 둘러싸고 한국교회 안에서 논란이 끊이지를 않고 있다는데 있다. 한마디로 한국교회의 이웃교단, 이웃교회를 인정하지 않는 전형적인 형태를 보여 왔고, 보이고 있다.

분명한 것은 이웃교회와 이웃교단을 인정하지 않으면, 종교전쟁만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이다. 오늘 중동에서 일어나는 분쟁 대부분은 이슬람교도 간의 분쟁이다. 종교개혁 이후 교파간의 갈등은 같은 하나님을 믿는 교인들 간에 죽이고, 죽이는 사태가 유럽 안에서 일어났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신학자들에 의해서 이신론이 제기됐다. 당시 유럽의 신학자들은 대부분 평신도들이었다. 한마디로 교파간의 갈등을 평신도들이 앞장서서 해결하려는 움직임을 보인 것이다.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교파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기면서, 교파 간의 갈등이 극에 달했다. 그러자 당시의 신학자들은 이신론을 들고 나왔다. 이신론은 개신교 사이의 교리적, 교파적인 갈등과 대립으로 인해 유럽 사회가 심각한 분열 양상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제기됐다. 종교를 계시나, 교리의 범주로 해석하지 않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로 등장했다.

이신론의 목표는 신의 본질을 해명하는 것과 함께, 신과 세계의 관계를 규정하는데 있었다. 이신론자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는 허버트는 “종교적 진리 인식은 초자연적인 계시로부터 주어질 뿐만 아니라 인간 삶의 공동체가 생례적으로 가지고 있는 종교적 진술로부터 온다”고 했다. 즉 허버트가 주장한 이신론은 원종교를 찾는 것이 중요했다. 더 이상 종교적 진리를 어떤 초월적 계시에서 찾지 말고, 원종교를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해석함으로써 그 다양성을 승인하는 것에서 피차간의 조화를 발견하자는 것이었다. 즉 다양성 속에서 일치를 추구했다.
오늘 한 하나님을 믿고, 한 성경을 보고, 한 찬송가를 부르며, 같은 신앙고백을 하면서도, 이웃교회와 이웃교단을 인정하지 않는 한국교회의 상황에서 귀담아 들어야 할 학설이 아닌가 싶다.

누구도 초자연적 진리, 즉 계시의 종교를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을 감지 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의 ‘정화’를 경험한 사람만이 가능하다. 분명한 것은 계시적 종교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제도화 되고, 그 주도세력인 성직자들이 몰입함으로써 타락하게 되어 그 본래의 기능을 상실했다.

이것이 오늘 개신교파들 사이의 교리 투쟁을 빙자한 권력투쟁의 실체이다. 그렇다 보니 오늘 한국교회는 교파주의, 교회집단이기주의, 개인주의에 빠져 이웃 교단과 이웃교회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을 믿고, 같은 신앙고백을 하면서도, 이단으로 규정한다. 허버트의 이신론에 따르면 역사에 개입해 들어오는 인격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천지를 창조하고, 일정한 법칙을 부여한 신, 하나님만이 존재한다. 신의 천지창조 목적은 인간의 행복에 있다.

또한 이신론은 정치적 관용과 결합된 종교적 관용을 매우 중요한 관심사로 여겼다. 전통적인 교리종교와 성직자 중심의 종교에서 발생하는 교리 때문에 생기는 갈등과 교리 때문에 발생하는 권력투쟁을 극복하기 위하여 종교 간의 관용이 매우 중요했다. 교리상의 갈등은 계시종교가 내세우는 진리에 대한 절대적인 주장 때문에 생긴다. 오늘 한국교회의 갈등과 이단은 교리 때문에 생간다고 보기보다는 성직자들의 권력투쟁에 의해서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오늘 분쟁을 겪고 있는 교회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대부분의 교회의 갈등과 분쟁은 담임목사와 원로목사, 교단의 지도자들에 의한 권력투쟁에서 발생했고, 발생하고 있다. 특히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한국교회 성직자들 중 권력투쟁에 몰입하는 자들은 정화되지 못한 사람이다. 그렇다보니 초자연적인 계시종교를 부인한다. 분명한 것은 구원받은 자만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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