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경제정의 한마디로 ‘나눔’

오늘 글로벌 시대, 세계화는 거스를 수 없는 하나의 운동이며, 되돌릴 수 없는 세계화운동이라는데 동의한다. 따라서 우리는 거기에 순응해야 한다, 저항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일반적인 생각이며, 남한민족, 아니 세계 모든 민족에게 뿌리 깊게 박혔다. 이러한 자본주의 세계화는 콜럼버스의 미 대륙 발견 당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야 옳다. 한마디로 오늘 세계화는 금융자본이 최고의 가치가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자본, 아니 재물을 어떻게 쓰느냐에 귀결된다.

재물을 사람 살리는데 사용하느냐, 아니면 재물을 침략의 도구로 삼느냐를 놓고 세계는 고민에 빠졌다. 분명한 것은 세계는 재물을 이미 무기화 했다. 많은 국가들이 재물의 노예가 되어버렸다. 그것은 종교도, 사회도, 정치도, 경제도, 외교 등 여러 분야에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성서에 나타난 경제공동체는 함께 나누는 것이었다. 성서의 경제정의는 한마디로 ‘나눔’이다. 그런데 교회나, 사회는 이와 같은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다는데 안타깝다.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물질, 자본주의에 중독되어 있지 않은가. 물질이 바로 신앙이 되어 버렸다. 하나님나라의 척도는 믿음이라고 말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하나님나라의 척도는 헌금의 액수이며, 자본으로 변질되었다. 따라서 신앙생활도 재물이 있어야 한다. 교회도 돈이 있어야 다닌다. 돈이 있어야 부자교회도 부임 할 수 있다. 교회의 목회자 대부분은 재물을 많이 헌금하는 교인에게 축복해 준다.

이것은 기독교의 선교 명령과 자본주의적 세계화 의지의 결합이 가져다가 준 결과임에 틀림없다. 이를 스페인인과 미국인들은 두 문명, 즉 남미문명과 유럽문명의 만남이라고 부른다. 미국은 1992년 10월 12일을 ‘콜럼버스의 날’로 선포했다. 그리고 콜럼버스의 미 대륙 발견 500주년 축하행사를 대대적으로 가졌다. 이는 콜럼버스가 미 대륙을 정복한 날을 기념하는 행사였다,

미국의 레이건 정부는 뉴욕의 자유 여신상과 바르셀로나의 컬럼버스 동상과 맺어주는 결혼식을 거행했다. 식민지 정복자 콜럼버스와 식민지 해방자 자유의 여신상의 결합은 기괴하다 못해 오늘날 미국 대외 정책의 이중성을 그대로 노출시켰다. 아니 자유라는 이름으로 가난한 나라들을 괴롭히는 미국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제 세계는 미국을 정점으로 1극체제가 되었다.

오늘 선진국들은 자유라는 이름으로 경제적 정복을 일삼고 있다. 제국주의 침략을 민주주의 수출로 미화하고 있다. 이제 세계는 미국의 양보 없이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세계는 자유와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정복을 당하고, 정복되고 있다. 기독교는 서양의 것이 되었으며, 기독교가 바로 서양이라는 인식이 세계인들의 머릿속에 꽉 차 있다. 십자군 전쟁 이후, 양차대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대부분의 전쟁은 자본과 물질을 앞세운 기독교의 원리주의자들에 의해서 일어났다는 사실에 대해 긍정하고 싶지 않다. 그러면서도 거스를 수 없는 세계화운동이 되었다.

언어학자이며, 반제국주의 비평가인 노염 촘스키 교수는 “정복자 남신상과 자유의 여신상의 결합은 제국주의의 야합이다”고 비판했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덴도 “대양 항해기술은 유럽인들과 비유럽인들 사이에 대칭 관계를 만들었고, 따라서 세계적 척도에서 보면, 유럽인들에게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 주었다”고 비난했다. 이 말은 바다를 지배하는 자는 무역을 지배하고, 무역을 지배하는 자는 세계의 부를 지배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유럽인들에 의한 세계화는 한마디로 서구문명의 정신적 승리이며, 심리적 정복의 성격을 띠고 있다. 콜럼버스 이래 정복자들은 주민들에게 서구의 언어와 의복뿐만 아니라, 가치관과 관습까지 강요했다. 그것은 일제 식민지세력에 의해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유럽의 것이 문화라면, 다른 대륙의 것은 민속이고, 유럽의 것이 종교라면, 다른 대륙의 것은 미신이고, 유럽의 것이 언어라면, 다른 대륙의 것은 방언이며, 유럽의 것이 예술품이라면, 다른 대륙의 것은 민속품이 되었다. 한마디로 정신적 심리적 정복을 당한 대륙의 역사는 ‘일식의 역사’였다.

한교연의 사랑의 연탄 나누기 사역.

“성서의 정의인 ‘나눔’을 실천하는 교육 절실하다”
오늘날 자본주의적 경제체제의 승리는 사회적, 정치적 불안을 위협적으로 야기

서구의 세계화 정신적 심리적 정복

유럽인들의 세계화는 콜럼버스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것은 기독교적 선교명령과 제국주의적 의지의 결합이다. 콜럼버스는 스페인의 페르난데스 왕과 이사벨라 여왕이 참석한 미대륙 항해 출발 미사에서, “하나님이 승리하실 것이다. 지구상에 있는 모든 백성들의 우상들을 비로 쓸어버리고 그들이 처한 곳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게 할 것이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도를 굳게 믿고 항해에 나섰다.

세계화를 통한 전 세계의 연계는 시장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지구적 평화를 가져다가 주었는가(?)에 대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냉철하게 판단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예수님의 세계화는 이것이 아니었다. 세계민족을 제자로 삼아 세례를 주고, 하나님나라를 선포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에서 고난당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나라를 선호하고, 이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였다.

자유, 규제철폐, 사유화라는 도식으로 미국과 일본, 서구유럽의 자본주의 국가들은 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 세계무역기구의 지원을 받아 남반부의 가난한 나라들에게 시장통합을 강요해 왔고, 오늘도 계속해서 강요하고 있다. 시장경제를 통해 얻은 수익은 후진국과 자연스럽게 나누기보다는 부자나라들이 배를 채우는데 사용돼 왔다. 한마디로 오늘날 세계는 하나님의 통치가 아니라, 금융자본이 지배하고 있다.

여기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마저도 모두 부자나라들이 가져가 버린다. 오늘날 자본주의적 경제체제의 승리는 사회적 분열과 정치적 불안을 위협적으로 증가시키고 있다. 민족사이, 국가 내에서 승리자와 패배자의 골은 깊어지고, 빈부의 격차는 크게 벌어졌다. 자본가들과 임금노동자들 사이의 소득 격차는 유럽의 국가에서도 놀랍도록 심각해졌다. 모든 성장의 열매는 세계 인구의 5/1만이 차지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더 빈곤해 지는 빈익빈 현상이 심각하다.

한마디로 성서의 경제정의인 ‘나눔’에서 이탈했다. 세계인구의 5/1은 하루에 1달러도 안되는 수입으로 살아가고 있다. 경기가 나빠지면 자본가들은 구조조정을 단행한다. 노동자들은 해고되고, 기업은 몸집을 줄인다. 그 다음은 재가동화를 통해서 다시 이윤을 창출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굶주린 배를 더 주리며, 고통 받거나, 비정규직화와 부당한 해고의 위협으로 인해 생존은 불안정하다. 우리는 IMF를 통해 경험했다.

오늘 국내기업들은 IMF 당시보다도 경제가 어렵다고 말하며, 정부에 감세를 요구한다. 세계화는 자본의 자유화와 더불어 한국의 노동자 등 세계민족 가난한 사람들의 현실은 참담하기만 하다. 부자는 계속해서 부자 되는 부익부, 가난한 사람은 더욱더 가난해지는 빈익빈 현상이 그대로 나타났다. 세계화가 개발도상국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축복이 될 것이라는 예언은 한마디로 빗나갔다. 세계화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축복이 아니라 저주로 나타났다. 대부업체에서 급전을 빌리는 사람은 거의 비정규직 노동자거나, 실업자, 가난한 영세업자들이다.

콜럼버스가 “하나님은 승리하실 것이다”고 굳게 믿고 출발한 기독교 세계화의 꿈은 500년이 지난 오늘날 하나님이 승리하신 것이 아니라, 맘몬이 승리했다. 하나님의 자리를 돈이 차지했다. 이제 교회마저도 하나님보다도 맘몬을 노래하며, 돈 많은 교인들을 좋아하고, 이들의 기업과 가업을 위해서 축복해 준다. 전국 방방곡곡에 수많은 교회당이 세워졌지만, 이 교회들은 무엇이 그리 서러워서 눈물을 흘리는 부자들의 눈물을 닥아 주기에 바쁘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은 더 이상 교회를 찾지 않는다. 교회는 생명력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백낙준 교수는 닥쳐올 교회의 모습을 예상하고, “한국에서의 참 교회는 농촌교회이며, 참 목자는 농촌교회를 섬기는 목자이고, 참 교인은 농촌교회의 교인이다”고 말했다. 사실 한국의 농촌교회는 80년도 이전까지 교인들을 양육해서 도시에 내보내, 도시교회 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다. 한마디로 한국교회 성장의 못자리 역할을 농촌교회가 감당했다.

▲ 한장총이 꿈나무를 방문해 사랑을 실천에 옮겼다.

성서의 경제정의인 ‘나눔’을 실현하라

선교초기 한국교회는 병들고 지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교회로서 그 사명을 다했다. 그러나 교회가 세계화의 자본주의에 빠져들면서, 교회는 이들을 위해서 일하지 못했다. 가난한 사람들의 종교라는 불리던 당시 한국기독교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한국교회도 ‘돈’이 ‘신’이 되어버렸다. 성서의 경제정의에서 이탈했다. 선교초기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가진 것을 이웃들과 나누며, 생활공동체를 이루었다. 나라 잃은 민족을 위해서 전 재산을 아낌없이 내 놓은 인사들도 있었다. 한국교회 안에 생명이 흘러 넘쳤다. 성서의 경제정의인 ‘나눔’을 철저하게 실천했다.

1991년 콜럼버스의 미 대륙 발견 500주년을 맞아 독일 <슈미켈>의 기자는 오늘 세계화의 현실,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경제 질서를 이렇게 묘사했다.
“전능하신 하나님 대신 시장이 등장했다. 이 신의 현현은 다우존스 주가지수이고, 그의 성체는 미국의 달러이며, 그의 미사는 환율조정이고, 그의 나라는 지금 크렘린의 지도자들까지도 찬양하는 자본주의 보편문명이다”

세계화를 통하여 미국 1극체제로 변한 세계는 미국의 영향 아래 있다. 세계는 이제 미국의 허락 없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오늘 한국교회가 친미적인 모습을 띄며, 같은 민족인 북한 민족을 적대시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기독교가 국민들이 선출한 대통령은 부정하면서, 성조기와 태극기를 들고 태극기집회를 주도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심지어 여기에 침략국인 일장기까지 등장한다.

한국교회는 한국선교 당시부터 철저하게 영미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으며, 민족구원을 거기에 기대어 왔다. 한국교회의 교인들은 그렇게 교육을 받아 왔고, 받고 있다. 이런 교인들의 시각은 북한을 적대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고, 우리민족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도 쉽게 포기해 버린다. 그리고 한반도의 평화와 한민족의 화해, 남북한의 비핵화, 평화적인 민족통일을 노래하는 국민들을 향해 ‘좌경’, ‘빨갱이’로 매도해 버린다.

오늘 분단된 대한민국은 남북한의 경제 교류도, 한반도의 평화도, 한민족의 화해도 미국의 허락 없이는 할 수 없다. 오늘 자유라는 이름으로, 민주라는 이름으로 한민족은 미국에 의해서 끌려 다니고 있다. 이산가족의 아픔은 더해가고 있다. 대한민국은 일본식민지세력이 물러나면서, 새로운 세력이 몰려오고 있다는 것을 몰각했다. 그 중심에 한국교회가 있었다. 오늘 한국교회는 가진 것이 너무 많아 내려놓을 수가 없다. 원리주의와 근본주의 빠져 반통일적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 나라는 혼자 가는 곳이 아니다. 너와 나, 그리고 그가 함께 가야 하는 곳이다. 또한 남한 민족만이 가는 곳도 아니다. 남북한 민족, 아니 세계민족이 함께 가야하는 곳이다. 성서는 분명하게 교훈하고 있다. 그래서 통일신학자와 선교신학자들은 하나님께 드린 재물을 한반도의 평화와 한민족의 화해, 평화적인 민족통일, 가난한 세계민족을 위해서 재투자하라고 선언한다. 그곳이 바로 예수님께서 활동 하신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곳에 교회를 세우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재물 생명 살리는데 사용해야

이쯤 되면 하나님이 주신 재물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는 분명해진다. 재물은 어디에 쓰느냐에 따라 생명력과 가치를 갖는다. 우리는 국회 청문회를 보면서, 많은 것을 느끼고 있다. 재물로 인해 장관에 오르지 못하는 인사들을 많이 보아 왔고, 보고 있다. 또한 재물로 권력은 얻었는데, 민심을 얻지 못한 사람들도 많다. 분명한 것은 사람 모두는 재물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재물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꼭 필요하다. 그러나 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한국 기독교 130년의 역사 가운데 자신에게 주어진 재물을 생명을 살리는 일에, 나라를 살리는 일에 아낌없이 사용한 참 그리스도인들을 발견한다. 이회영 선생의 6형제는 전 재산을 팔아 독립운동을 위해 희사했다. 이들 6형제는 “사대부 명문가로 일본의 노예가 되어 호의호식 할 바에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자”는데 뜻을 모았다. 그리고 전 재산을 나라의 독립을 위해 내놓았다. 이회영 선생의 형제는 건영, 석영, 철영, 시영, 호영 등이다.

이 형제들은 을사오적 암살, 신민회, 헤이그 특사파견, 고종황제 망명 계획, 신흥무관학교 설립, 의열단 등 국내외서 항일운동을 벌였다. 이 형제들이 보여준 나라사랑은 호의호식하며, 살수도 있는 길을 마다하고, 사회의 지도자, 민족의 지도자로서 민족의 아픔을 어깨에 짊어지고, 아리랑 고개를 힘겹게 넘었다. 이 길은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이었으며, 민족과 함께 가는 길이었다.

이회영 선생의 형제 6명은 가족 50여명과 함께 아리랑고개를 넘어 만주로 갔다. 이들은 만주에서 독립운동에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을 모아 항일무장투쟁의 선봉에 섰다. 이회영 선생 가족들이 독립운동에 내 놓은 돈은 현재의 가치로 600억원에 이른다고 한다. 이회영 선생의 가문은 대대로 명망 높은 집안으로 재산도 방대했다.

그렇다 보니 일본식민지세력은 돈과 귀족지위를 내세워 회유할 수 밖에 없었다. 6형제는 이를 단오히 거절했다. 오히려 전 재산을 팔아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모두 내놓은 것이다. 한마디로 힘든 결정이었다. 이 돈으로 이회영 선생 6형제는 먼저 신흥무관학교를 설립, 항일무장투쟁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리고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독립군을 길러 냈다. 김좌진 장군을 비롯한 지청천 장군, 이범석 장군 등 3천명의 정예군을 길러낸 것이다.

또 우리는 함경도 출신 김야긴 목사에게 주목한다. 김 목사도 전 재산을 팔아 용정에 명동학교를 설립, 독립지사들을 길러냈다. 윤동주를 비롯한 송몽규, 문익환, 강원용 등이 바로 그들이다. 김목사는 재물을 통해 생명을 얻은 것이다. 기생이었던 김향화 열사 역시 재물을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사용했다. 대가집 딸로서, 대가집 며느리로서, 항일무장투쟁을 벌인 김락 열사 역시 재산을 항일무장투쟁을 위해서 아낌없이 내 놓았다.

김락 열사 자신은 일본경찰의 고문에 의해 두 눈을 잃어버린 채 옥사했다. 이런 독립투사들은, 재산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인식을 갖고, 전 재산을 나라의 독립을 위해 내놓았다는데 의미를 갖는다. 유한양행의 설립자이며, 독립운동가인 유일한 박사 역시 오늘을 살아가는 대한민국 국민 모두는 존경한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인 이었다. 그는 자신의 재산에 대해 자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잠시 나에게 맡기신 것이라고 믿었다.

유 박사는 한국에도 좋은 공업학교를 만들어야 한다는 신념 아래 1970년에 유한교육재단을 설립했다. 그리고 직업교육기관인 유한공업고등학교와 유한공업대학교을 세웠다. 유 박사는 유언장에서 “자기 명의로 된 주식 전부를 한국사회 및 교육기금으로 기증하게 하고 아들에게는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앞으로는 자립하여 살아가라”는 당부의 글을 남겼다. 그의 딸인 '유재라'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비롯하여 전 재산 205억 원을 공익재단에 기부하고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문제는 우리가 이들을 잊고 살았다는 것이다.

반면 돈을 버는 기술만을 배운 사람들은, 오늘날 문제가 되고 있는 연예인들은 수 억원을 드려 해외에서 생일잔치를 연다. 그것은 돈을 좋아하는 일부 목사도 그렇다. 이들은 가진 것이 너무 많아 한반도의 평화와 한민족의 화해를 위해서 봉사하지를 못한다. 가진 것을 나눌 수 없기 때문이다. 성서에 기록된 초대교회는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가진 것을 가지고 나와 필요한 만큼 함께 나누는 생활공동체였다.

그렇다. 재물은 함께 사는 모든 사람들의 것이며, 함께 사는 세상의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가 세상 속에서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물질 중심의 신앙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물질의 노예가 된 나머지 십자가 철탑을 높이는데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런 신앙에 갇혀 있는 한 한국교회와 우리사회는 한마디로 희망 없다. 우리 모두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해 보자.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재물, 생활에 필요한 만큼만 쓰고, 기아와 질병, 전쟁으로 고통 당하는 세계민족과 이웃을 위해 쓰겠다고 소원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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