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현주 목사.

억울한 일을 해결해야 하는 동생이 한 사람 있습니다. 집안 재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유산을 큰 아들, 형에게만 모두 물려주었습니다. 형이 큰 아들이기에 아버지의 모든 것을 물려받았습니다. 동생 생각에 아무래도 이건 부당합니다. 공평하지 못합니다. 내가 당하고 보니 불의인 것 같습니다. 나라면 어떻게 생각 하겠습니까? 이 동생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 동생은 같은 자식인데, 작은 아들이란 이유만으로 유산을 받을 수 없다니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더구나 아버지의 인정을 못 받아 더 속이 상합니다.

언젠가 자신도 스스로의 이름으로 무엇인가를 보란 듯이 해 볼 마음이었습니다. 형에게 말해 보았자 소용이 없었습니다. 법이 그러합니다. 여기저기 억울함을 호소하러 다녀봅니다. 어떻게 하면 나줘 가질 수 있을까하여 이 선생님 저 선생님의 도움을 구하러 다니는 게 일상이 되었습니다. 누구하나 시원한 해결책을 주지 않습니다. 형은 갑자기 이제 부자 주인이 되었는데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없이, 아무것도 할 수없이 그전이나 다를 바 없는 가난한 삶을 이대로 한평생 살아야 하는 것이 답답할 뿐입니다.

그러다 서로 밟힐 지경이 되도록 수만 명이 모여들고 있는 집회에 가게 되었습니다. 앞에 서신 선생님 보통사람은 아닌 것 분명합니다. 이 선생님이라면 답을 줄 수 있겠습니다. 형도 이 선생님의 말은 듣겠습니다. 이제야 자신의 문제를 풀어 줄 분을 만난 것 같습니다. 주 예수 앞에 나가게 됩니다.

주 예수께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까?
“선생님, 제 형에게 명하여 유산을 나에게 나누어 주게 하소서”

형이 받은 재산을 나누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공정하지 못한 불의를 바로잡아 달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정의를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 예수께서는 정의에 부름에 정의가 실현 되도록 답해야 합니다. 어느 재판장보다 더 정의로운 분이십니다. 구했으니 내 말을 들어주겠습니다. 나 자신의 이 억울함을 주님은 풀어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탐심을 물리치라 꾸짖으십니다. 자신 속에 있는 탐심을 먼저 없애라 하십니다. 이 동생의 탐심은 무엇입니까?

“재산이 아무리 많더라도 사람의 생명이 거기에 달려 있지 않다 하시니”
생명의 주 예수께 나아와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까? 이 사람이 구한 것은 무엇입니까?
생명을 구합니까? 형입니까? 형이 가진 돈, 재산입니까?

이랬다면 어땠을까요? 유산 때문에 형을 잃어버렸습니다. 서로 남처럼, 남만 못하게 지냅니다. 형을 다시 찾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형과 전처럼 사이좋고 반갑게 지낼 수 있을까요 형을 돌려주세요. 더구나 자기가 생각한 자기 몫의 돈에 눈이 멀어, 자기연민, 자기 욕심에 빠져있어 눈앞의 메시야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가난만을, 불행만을, 못 가진 것만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형이 가진 돈과 억울함 때문에 생명의 주 앞에서 온 세상 구주이신, 모든 소유권의 왕 앞에서 여전히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이 됩니다. 천하를 다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소용없습니다. 그러나 돈 앞에선 아무것도 안보이고 안 들립니다. 세상 살면서 온갖 축복을 다 받고도, 모든 것을 다 가지고도 탐심과 함께 주님이 주인인 주님나라, 천국에 이르지 못한다면 슬픈 일이 소용없는 일이 됩니다.

탐욕에서 자유 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놓칩니다.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얻게되는 기회를 놓칩니다. 불의를 바로잡아 달라는 이 사람에게 먼저 자신 속에 있는 탐심을 지적합니다. 돈 앞에서 부모 자식도, 형제 친척도, 친구도 원수가 되게 하는 돈의 법칙 세상의 법칙, 그것을 보시고 꾸짖으시는 주님입니다.

‘혼자 모든 것을 독차지 한 놀부 같은 욕심쟁이 형, 빈털터리 가난한 흥부 같은 착한 동생’ 이런 것이 아닙니다. 동생의 마음을 살피지 못하고 혼자 다 가진 형이나, 죽는 날까지 한평생을 같이 할 형과의 돈독한 우애보다는 형이 가진 돈만 보고 눈이 멀어버리고, 움직이는 동생이나 중심의 탐욕은 같습니다. 탐심에 쌓인 정의는 들어줄 수 없습니다. 언제나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주 예수를 누구라 생각합니까?

제자들과 함께 이 땅에 계신 동안 늘 물으신 물음이기도 합니다. 주 예수 앞에 나왔으면서도, 주 예수 앞에 살면서도 더 이상 그가 누구인가 알려고,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가 누구인가는 관심 없습니다. 오직 자신의 문제에만, 자신의 관심사에만 , 언제 어떻게 해결 될 것인가에만 집중하고 이것들과 씨름하느라 여전히 전전긍긍 하면서 살아갑니다.

주 예수가 누구인 줄 알았다면 영광의 주님을 즉시로 예배하고 순종 할 수 있었습니다.

자기를 찾아오셔서 자기대신 십자가를 지고 죽을, 자신의 주인을 사랑하고 경외할 수 있었습니다. 돈이면 다되게 해주는 이 세상의 탐욕에서 자유 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죽음 앞에선 무용지물인, 생명 앞에선 소용이 없는 그 만큼의 돈보다 온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부요의 왕을 만나는 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삶을 알게 됨으로 생애 대 반전을 맞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가난만을 불행만을 걱정하였습니다. 형이 가진 돈과 억울함으로 생명의 주 앞에서 왕 앞에서 여전히 가난하고 형까지 잃어버린 억울한 사람이 됩니다. 결국 재산을 나눠달라는 이 사람에게 물건 나누는 자 아님을 말씀합니다. 너희에게 이미 그런 일을 하는 세상 재판장이 있다 말씀합니다.

“지혜도 보호하는 것이 되고 돈도 보호하는 것이 되나 지식이 더욱 아름다움은 지혜는 지혜를 얻는 자의 생명을 보호함이라” (전도서 7장 12절)

돈과 생명사이에서 늘 방황하는 우리에게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될 것을 말씀합니다.
가진 소유를 팔아 생명을, 주님나라를 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를 사서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서울 항상기쁜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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