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한국교회와 독자 여러분 가정에 충만하기를 기원드린다. 오늘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지 사흘 만에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을 기념하는 부활절이다. 주님은 인류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 승리하심으로써 인류 구원의 사명을 완성하셨다.

이 땅에 교회들은 예수 부활의 증인으로서 특별히 고난당하는 백성들을 위로하고 상처를 보듬어야 할 사명을 부여받았다. 가난과 질병, 장애와 차별로 고통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이 한국교회가 부활의 증인으로서 감당해야 할 사역지이다.

그런데 매년 돌아오는 한국교회의 부활절은 고난당하는 이웃에게 눈길 한번 제대로 줄 겨를이 없어 보인다. 그런 마당에 교회마다 또는 지역마다, 더 나아가 연합기관 차원에서 드려지는 대규모 부활절 연합예배가 주님의 부활을 무슨 수로 제대로 증거하겠는가.

한국교회에서 부활절연합예배는 한 때 보수 진보가 한자리에서 예배드린다는 것만으로 무슨 대단한 자랑거리인양 여겨왔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고백하고 부활 예수를 증거하는 교회들이 같은 자리에서 드리는 예배가 무슨 그리 대단한 일인가. 너무나 당연한 것을 지나치게 특별하게 포장하는 한국교회의 유별난 재주를 누가 따라가겠는가.

그런데 이마저도 점점 힘들어지는가보다. 올해는 한기총, 한교연, 한교총, 교회협 4개 기관이 각기 따로 연합예배를 드리게 되기 때문이다. 기관마다 따로 예배를 드리든, 같이 드리든 별 의미는 없어 보이는데 문제는 한술 더 떠 아직도 목불인견의 세 불리기와 정통성 경쟁을 하면서도 별 부끄럼이 없다는 것이다.

과거 부활절에 한국교회가 여의도 광장에서 대규모 연합예배를 드리는데 의미를 두게 된 것은 한국교회의 성장과 부흥을 대내외에 과시하는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지금은 대형, 대규모라는 프레임에 갇히는 것이야말로 구태로 여기는 시대이다. 한 때 보수와 진보가 서로의 간격을 좁혀가면서 동질성을 회복하는 연례행사로 자리 잡았었다면 지금은 어느 단체가 주최하는 행사에 몇 명이 모이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조차 창피한 일이 되어버렸다.

결국 “도토리 키재기”란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닌가 싶다. 이런 소모적이고 헛된 경쟁 심리야말로 한국교회의 분열을 심화시키고 부활의 증인이 아닌, 부활하신 주님 얼굴에 먹칠을 하게 만드는 짓거리라는 것을 한국교회 연합기관들을 제발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얼마 전 헌재가 낙태 처벌법에 대해 헌법불합치 판결을 내렸다. 태아를 가진 여성이 자기의 주관적인 판단으로 얼마든지 낙태를 해도 법으로 처벌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는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다 하신 하나님의 복음의 진리가 임신부의 자기결정권 앞에서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 교회사적으로 매우 중대한 사건이다.

헌재의 판결이 난 날 한국교회 주요 연합기관들은 일제히 비판 성명을 발표했다. 헌재의 판결을 비판하며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경시하는 풍조가 만연하게 될 것을 우려한다는 내용으로 일관했지 뚜렷한 대안을 제시하거나 과감한 행동을 주문하는 내용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가 영원한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진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세상은 거꾸로 고귀한 인간의 생명조차 함부로 죽이고 제거하는데 환호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정신 못 차리고 쓸데없는 연합예배 경쟁에 목을 매는 동안 세상은 교회를 조롱하며 점점 더 멀리 제갈 길을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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