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 태 영 목사

 세상은 모순과 비리로 가득하다. 정직한 사람은 구박을 받고, 불의한 사람은 큰 소리 친다. 그리하여 진실하게 살고자 하는 이들의 마음에 갈등이 일어난다. ‘세상살이라는 게 꼭 진실대로만 되는 게 아니라’고. 이런 모순과 갈등을 꿰뚫어본 시인은 막연히 선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의를 사모하며 선하게 살라고 한다. 사람들은 세상의 모순에 대해 하나님을 향하여 불평하거나, 나보다 잘 사는 자들을 시기할 수 있다(시 27:1). 명색이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이 지경에 이르면 그보다 더 궁색한 일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악을 질책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 아닌, 선을 행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어야 함을 주장한다. 형편이 좋을 때만 선을 행하고, 이익과 손해를 헤아리며 선을 행한다면 선한 삶이라 할 수 없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 땅에 대한 약속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주신 가장 확실하고 구체적인 복이다. “온유한”(πραὔς) 이라는 형용사는 부드러운, 친절한, 너그러운, 겸손한 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온유한 사람은 겸손하면서도 하나님을 위해 남다른 자제력과 결단력을 지닌 사람이다. 그리하여 온유한 자를 동시에 “의인”(시 37편)으로도 번역하기도 한다.

성경은 온유한 성품으로 모세와 예수 둘을 지목하고 있다(민 12:3, 마 11:29). 아카페 사랑의 속성 가운데 하나가 온유이다(고전 13:4). 성령의 열매 중 하나도 온유이다(갈 5:22-23). 그러나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영혼에 상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다. 모세가 그랬고, 예수께서 그랬다. 온유한 사람이라야 그가 사는 땅에서 믿음을 얻고, 존경을 받으며, 지도자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의 다스림에 온전히 위탁하는 자라야 “땅”을 기업으로 받을 수 있다. 나라를 잃은 분노이든지, 불의에 대한 노여움이든지, 짓밟힌 신성모독에 대한 저항이든지 자신의 감정대로가 아닌 하나님께 온전히 포섭된 자, 곧 온유한 자라야 그 땅의 참된 지도자가 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온유한 사람이 지도자가 되어야 그 땅의 사람들이 복을 누린다.

삼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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