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종교다원주의자들과 상대주의

▲ 김재성 목사
기독교에 대한 편견과 종교다원주의자들로 인한 목회적인 상황이 악화되면서, 이제는 미국에서마저도 전혀 기독교적인 풍토가 아니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건국의 조상들이 모두 다 청교도 신앙이었다고 하는 미국에서조차도 목회자는 반드시 전도하고 선교하는 임무를 기본으로 삼야야만 한다는 주장을 내놓게 되었다.

21세기는 마치 현대화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여도 받아들이는 시대가 되었다. 현대예술은 현대인들이 하는 것이지만 도무지 알 수 없다. 현대음악은 현대인들이 이해하기 어렵고, 현대 미술은 현대인들이라 해도 어려워서 제 마음대로 해석한다. 행위예술, 전위예술, 설치예술 등등 이전에는 그것이 예술적인 표현이었는지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던 것들을 시도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남녀 간의 정상적인 사랑의 소중함과 신성함이 결혼과 가정의 기본조건이라는 개념이 무너지고 말았다. 각각 동성애를 하는 호모 섹스를 하는 자들이 마치 진보적이고 개방된 사람인 양 착각하는 시대가 되었다. 현대신학은 현대인들조차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예수를 동성애자로 주장하는 자 (Noel I. Garde)의 해석은 또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앞에 나온 결혼설이 엉터리라고 하면, 이것 또한 현대신학이라고 해서 소개해야만 하는 것인가? 그는 예수가 동성애자였다고 주장하면서, 사랑하는 제자 요한과의 관계성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시대가 받아들일 처지가 아니므로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그냥 난동을 부리다가 죽었다는 것이다. 이를 반박한 밀러는 예수님은 동성애자가 아니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아버지에 대한 부정적 감정과 분노가 일반적인데, 전혀 그런 내용이 없다. 어머니와 동생들의 보호와 양육에 힘쓰다가 결혼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유대인들의 한 사람으로 해석하려는 자들은 갖가지로 흩어져 있다. 샌더스 (E. P. Sander)는 청년 예수, 싸움꾼 예수, 성전과 유대인의 생활방식을 개혁하려했던 예언자로 해석되고 있다. 어떤 이는 열심당에 속하는 혁명가로, 기성 종교를 방해한 마술가로, 삼마이 파 바리새인들에게 저항한 힐렐파의 바리새인으로, 갈릴리 지방에서 카리스마를 발휘한 지도자로, 토라를 가르친 랍비 등으로 여전히 분산되어있다.

5. 흑인, 백인, 조선인 예수?

21세기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주의는 철학이 성행하고, 극도의 개별주의가 만연하고 있다. 신학의 세계에서도 극단적인 사상가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처럼 정통 기독교의 가르침을 흐트러트린 이들의 갖가지 고안들을 정리하자면, 그 숫자를 다 헤아릴 수 없다. 하지만, 여러 강조점들이 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가르침에 속해 있는 것에서 일부분씩을 마치 진열해 둔 것과 같다. 재림 주로서 예수를 강조하는 마라나타 기독론, 기적을 행하는 사람으로서의 예수를 강조하는 양성론, 하나님의 지혜가 현현된 사람으로 보는 이해, 로고스 기독론, 대속적 기독론, 사망 권세를 이기는 승리자 기독론, 위대한 군주보다 더 큰 통치자로 보는 통치적 기독론, 사회 밑바닥의 사람들을 가르친 위대한 교사 기독론 등이다. 그러나 그 어느 한 가지만 가지고 완전한 기독론이라고 말할 수 없다. 예수님은 너무나 위대한 분이시기에 앞에 열거한 제목들은 모두 다 한 조각일 뿐이요 일부분에 해당한다.

필자는 또 다른 기독론의 왜곡을 접하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그러고 보니, 예수님에 대한 기상천외할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이 아니다. 세상에 널려있었다! 2006년 여름, 아프리카 케냐에서 열린 세계복음주의 신학회에 참석해서 나이로비 신학대학원 교수의 발표에서 이상한 주장을 들었다. “예수님은 아프리카 사람들처럼 흑인이었고, 같은 피부 색깔에서만 공감을 가질 수 있는 고난의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일종의 아프리카인들의 신학이라 하면서, 흑인 예수의 형상을 가졌다는 자부심이 크다고 주장하였다.
그러고 보니, 오래전에 한국의 유명한 동양화가 김학수 화백이 삿갓을 쓰고, 양반 옷을 입으신 예수님을 그렸었는데, 그저 만화처럼 재미있게 보았던 추억마저도 이제는 오싹해지고 말았다. 예수님이란 아프리카에서는 흑인이 되고, 한국에서는 멋쟁이 양반집 삿갓을 쓴 도령이 되어야하고, 남미에서는 가난한 자들의 해방자로, 미국에서는 동성연애자가 되어야 하는가?

<다음호에 계속>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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