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이며, 영화평론가인 장헌권 목사는 <망월동에서 보낸 편지>를 통해 5.18과 세월호 진상규명에 앞장서며, 그날의 생생한 기억을 전하고 있다.

망월동에서 보내는 편지

“민주의 꽃으로 피어나리/아니 진즉 핀 자유의 꽃 //으깨어지고 일그러진/시간 모아/핏물 적셔/말라 버린 뼈들이/펜촉되어 편지 쓴다//우리는 결코 죽은것이 아니라/살아/뻔뻔한 학살자의 섣부른/용서와 사면을/후회한들/무슨 소용이 있으랴//다시 일어나는 오월의 새싹을 보라 /다시 피어나는/이팝나무 춤추는/망월동을 보라!”

시인이며, 영화평론가인 장헌권 목사의 <망월동에서 보낸 편지>이다. 장 목사는 5.18과 세월호 진상규명에 앞장서며, 그날의 생생한 기억을 전한다. 광주 서정교회를 담임하며, 민주•평화•정의•인권운동에 앞장서온 장 목사에 의하면 5.18민주화운동은 성숙한 광주시민의 민주화운동이며, 예수님의 비폭력 평화(샬롬)운동이었음을 분명히 밝힌다. 장 목사는 1981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1주년을 맞아 수요예배에서 5.18참상과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설교를 했다.

그 때 장 목사는 호남신학교 4학년에 재학중이었다. 당시 공개적인 자리에서 광주의 아픔을 꺼낼 수 없었던 상황에서 장 목사는 용기를 냈다. 당시 전남대학교에 다니던 바로 아래 동생(장헌일 목사, 생명나무숲교회)이 집에 들어오지 않아 도청 앞에 상무관에 놓여 있던 주검들의 이름표를 일일이 확인했는데, ‘장하일’이라는 이름표가 있어서 얼굴을 확인해 보니 동생이 아니었다고 상황을 털어 놓았다.

해마다 5월이 오면 장 목사는 “우울하고 답답함과 살아남은 자로서 죄책감이 휩싸인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광주의 정신 저항정신과 민주, 평화, 인권의 광주도시가 자랑스럽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인권운동에 앞장사게 된 배경을 설명한다. 장목사는 그는 지난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이후 세월호 유가족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보듬으면서, 진상규명을 위한 활동에 앞장서왔다.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세월호 선장 이준석 씨에게 편지를 보냈고, 그가 보내온 편지 내용이 언론에 공개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장 목사는 한국교회에 대해서 독일의 본회퍼 목사의 말을 인용해 “한마디로 값비싼 은혜를 싸구려 은혜로 만들고 있다”면서, “오늘 교회는 기복적인 맘몬신앙인 ‘번영신학’에서 벗어나야 한다. 교회가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정의와 자비, 평등과 평화의 가치 위에 세워진 것이다”고 교회의 예언자적 사명을 강조했다. 지난해 ‘5월 어머니상’을 수상한 장 목사는 오월과 영령들을 기만하는 행위는 절대로 용납하지 않겠다는 5.18 역사 왜곡 처벌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장 목사는 “민족의 모순인 분단된 조국을 생각하는 통일신학이 필요하다. 그동안 권력과 밀착하여 장로 대통령을 만들었지만, 얼마나 부패하고 탐욕의 정치였는가를 우리는 뼈저리게 느꼈다. 그래도 어느 누가 회개한 적이 없다”고 지적했다.

다시 5월 ‘그날’이 찾아왔지만 누구하나 책임을 지는 사람이 없다고 말하는 장 목사는 “누구나 5월하면 가정의 달을 생각한다. 하지만 광주사람들은 광주의 고통과 아픔을 생각한다. 저 역시 광주의 상처와 고통은 여전히 집단적인 충격인 트라우마가 있다. 우울하고 답답함과 살아 남은자로서 죄책감이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광주의 정신 저항정신과 민주, 평화, 인권의 도시인 광주가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번영신학을 사장시키라

아울러 장목사는 “5.18 당시 광주시민들은 하나가 되었다. 그것을 지금 우리는 광주의 정신이 된 것이다. 바로 대동정신이다. 시민군들을 위해서 주먹밥을 만들어서 주고, 너나 할 것 없이 헌혈을 하는 일도 했다. 또한 도청 앞에서 시민궐기대회 등 집회를 할 때 광주시민은 하나였다”면서, “5월18일부터 27일까지 은행이나 상점에 돈이나 물건을 가져간 일이 없는 평화 그 자체였다”고 말했다.

장 목사 그는 1981년 광주민주화운동 1년을 맞아 수요예배서 “너무도 슬픈 날이었다. 5월18일 기점으로 해서 5월27일 미명에 계엄군이 도청을 점령함으로 수 많은 젊은이들이 쓰러졌다. 우리는 이날을 보내는 이 마당에 주님의 음성을 듣고자 한다. 당시 전남고등학교 교사로 있었던 김준태 시를 낭독하므로 그때의 상황을 다시 한 번 머릿속에 되새기고자 한다. <아 광주여! 우리나라 십자가여> 아! 광주여! 무등산이여!/죽음과 죽음사이에 피눈물을 흘리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현재 우리가 진리편에 서서 광주의 울부짖음을 듣고 있다”면서, 사람이 죽으면 마땅히 제사를 지내는 것은 인간의 의무이다. 그 영정 앞에 모여서 그동안 일들을 고하는 것이 인간으로서 의무이다. 그런데 그러한 일도 할 수 없으며 조의를 표하는 검은 리본도 차고 다니지 못한 이 엄청난 비 진리에 속한 우리가 아닌가. 진실이 진실되지 못하며 참말을 참말 되지 못하는 이 땅에서 하나님은 지금 오늘 우리에게 진리편에 서서 주님의 음성을 귀담아 들으라고 람다. 이사야 58장 1절에 “크게 외치라 목소리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같이 높이라고 부탁하고 있다”고 교인들을 향해 외쳤다.

장 목사는 당시 공수 특전단의 잔악한 만행을 폭로했다.

“방망이를 휘둘러 마구 난타하며 뒤통수를 맞고 피가 낭자하게 흘리며 쓰러진 학생들이 있었으며, 시민들이 지켜보고 있는데도 붙잡혀온 학생들을 군화발로 짓밟고 기압을 주며 M16에 꽂은 대검으로 등과 허벅지를 사정없이 찔러 그었다. 그들을 굴비처럼 엮어 트럭에 싣고 갔다. 통금이 밤 9시로 단축된 것이 발표되자 귀가하는 학생과 젊은이들을 무조건 두들겨 패, 연행했다. 이를 만류하는 시민들까지 개머리판으로 마구 때렸다. 아벨의 울부짖음을 들으시는 하나님을 분노케 했다. 광주사태의 진실이 밝혀져야 하겠다”

장 목사는 광주민주화운동에서 죽임당한 신학교 1년 선배 문용동 전도사를 생각한다. 망월동국립묘지에 가면, 먼저 문용동 선배를 찾는다. 지난 5월 6일에도 다녀왔다. 문 선배는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을 해서 1학년 과정을 하고 계셨던 선배이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제가 독서모임을 하는 것으로 알고 좋은 책 있으면 소개해달라는 이야기도 했다. 문 선배는 당시 제일교회를 다니면서 상무대교회 전도사로 사역을 했다. 5월 19일 상무대교회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할아버지가 구타당하는 모습을 보고 말리다가 자신도 함께 구타를 당했다.

이후부터 시위에 참여하면서 공수부대가 철수한 후 도청 지하실에서 무기고 관리와 헌혈운동 등으로 활동을 했다. 지하실에 TNT와 수류탄이 폭발하면 위험해 뇌관분리작업을 했다. 전문가가 없어 관리에 어려움이 있었다. 24일 상무대에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 문관이 와서 뇌관분리작업을 도와주었다. 이것이 프락치설로 이어졌지만,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27일 새벽 계엄군이 들어오면서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는 소리를 듣고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자동으로 쏘아대는 총에 맞아 사망했다.

광주민주화운동과 세월호 진상 규명돼야

장 목사는 “광주민주화운동을 폄훼와 왜곡하고 있는 몰지각한 보수집단 극우세력들이 있다. 적폐를 청산하는 일과 촛불정신으로 정의와 평화 민주주의 정신을 지켜야 한다. 5.18은 비폭력 저항운동이다.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 우리의 선배들이 비폭력 저항으로 한 것처럼 광주민중항쟁도 비폭력운동이다. 그런데 무기고 탈취하고 교도소를 습격하고 간첩침투 등으로 가짜뉴스를 믿는 사람들이 있다”고 5.18을 왜곡하는 분노했다.

그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사진자료, 성명서, 책, 비디오, 영화, 계엄보고서 등 모든 자료를 보관하고 있다. 장 목사는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활동에도 열심을 내고 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 당시 광주기독교협의회(NCC) 회장으로 있었다. 6월부터 광주법정에서 선장과 선원들 재판이 시작 되었다. 안산에서 오신 가족들이 재판 후 법정을 떠나지 않고 있어서 결단을 했다.

상처와 아픔의 도시인 광주에서 이분들과 함께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우는 자와 함께하라는 말씀처럼 이분들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되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재판이 끝날 때까지 1년 4개월동안 함께하는 시간이 되었다. 그러면서 도보순례 서명운동 1인시위 등 했다. 특히 선장과 선원들에게 양심고백을 하도록 편지를 보냈다. 15명 가운데 처음에는 선장을 비롯한 다섯 명은 수취인거절로 반송이 되었다. 두 분은 회신을 했으며,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양심고백을 한 분도 있었다.

지금도 매월 4월 16일 기억의 날 행사를 하면서, 예술인 행동의 장도 하고 있다. 또한 저는 날마다 희생된 자녀들, 학생들 생일을 기억해서 페이스 북과 우리 시민상주라는 단톡방에 올리고 있다. 이것은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그리고 추모사업 등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야만 천부의 뜻인 생명존중과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일이다. 바로 하나님 선교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의 가치를 존중하는 일이다.

지난달에는 선장 이준석씨와 편지를 주고 받은 것이 공개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광주교도소에 선장과 선원들이 수감되었을 때, 편지와 <금요일엔 돌아오렴>이라는 책을 영치했다. 하지만 선장과 선원들 다섯 명은 반송되었다. 어느날 후배 목사로부터 선장이 순천교도소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때 성공할지는 모르지만 일단 면회를 갔다. 면회에 성공을 했다. 이후 편지를 주고 받게 되었다.

편지 내용을 공개했다. 의도적으로 한 것은 아니고 5주기 때 일간지 신문기자가 취재를 하는 과정에서 알려지게 되었다. 본인의 건강이야기와 희생자에 대한 죄송함과 잘못에 대한 참회 등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저와 국민과 유가족들이 바라는 것은 좀더 세월호에 관한 진실을 듣고 싶지만 아직은 아닌것 같았다. 언젠가는 마음이 움직이면 고백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 장 목사는 세월호 사건이 우리 사회에 던져준 교훈을 이렇게 말한다.

“세월호 참사는 단순한 참사가 아니다. 구조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했는데도 구조를 하지 않했다. 그리고 왜 침몰을 했는지 정부가 발표한 것에 대한 신뢰가 없다. 하나의 국가폭력이 된다는 것이다. 또한 이윤을 생각하면서 나오는 생명경시이다. 안전보다는 돈이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당시의 국가부재처럼 대통령의 7시간의 정치실종이다. 국정농단으로 국기가 문란된 것이다. 그리고 언론의 보도는 거짓이다. 아직도 진상이 밝혀지지 않고 있는 것은 진실과 정의가 없는 사회이다. 안전한 사회와 생명 존중하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 진실과 정의가 우선시 되어야 한다”

장 목사는 평화통일 운동에도 앞장서고 있다. 그는 예수님의 시간과 공간인 역사의 현장에 교회를 세우라고 말한다. 한민족에게 있어 그 역사의 현장은 곧 분단의 현장이다. 분단의 교회를 세우고, 한반도의 평화와 한민족의 화해, 평화적인 민족통일에 봉사하자고 제안한다. 또 이를 넘어 세계평화에 봉사 할 것도 주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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