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르몽

시몬, 나뭇잎 져 버린 숲으로 가자.
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낙엽 빛깔은 정답고 모양은 쓸쓸하다.
낙엽은 버림받고 땅 위에 흩어져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해질 무렵 낙엽 모양은 쓸쓸하다.
바람에 흩어지며 낙엽은 나지막이 외친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발로 밟으면 낙엽은 영혼처럼 운다.
낙엽은 날개 소리와 여자의 옷자락 소리를 낸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가까이 오라, 우리도 언젠가는 낙엽이니
가까이 오라, 밤이 오고 바람이 분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소석 정재영 장로(시인, 문화평론가)

▲ 정재영 장로
이 시는 매우 감각적이다. 감각이란 보통 시각, 청각, 촉각, 미각 촉각 등을 말한다. 이런 여러 가지 감각을 많이 동원하면 입체성의 감각을 가지게 된다. 이런 것들을 공감각이라고 한다. 이런 감각에 의탁하여 사고하는 감각론(육감론, sensationalism)은 경험론의 한 지파로, 모든 인식이란 감각에서 유래하며 감성에 없는 것은 지성에서도 없다고 본다. 즉 감각을 모든 인식의 근본으로 삼는다.

여기서는 낙엽이라는 사물의 빛깔을 바라보는 시각화, 낙엽 밟는 소리인 청각의 동원이나. 밟히는 촉각의 다양한 감각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사물의 견고한 이미지로 시적 표현의 선명성의 효과를 보여주고 있다. 내용은 매우 철학적인 담론이지만 드러냄의 방법은 감각성에 설득을 하여 감각적 언어로 한 폭의 그림을 그려 보여주고 있다.

‘너는 좋으냐?’ 묻는 것은 질문을 통한 독자의 답변을 요구하며, 강조하는 방법이다. 낙엽을 밟는 일이 좋다고 말하면 화자의 주관적 고백에 지나지 않지만 질문을 통해 객관적으로 확인하게 하는 수법이다. 이것을 언어적 아이러니라고 말한다. 알면서 모른 척 하는 것으로, 소크라테스가 제자들에게 질문만 하고, 답변은 제자들이 하게 함으로 그들 스스로 깨닫게 하려고 잘 사용하였다 하여, 일명 소크라테스적 아이러니라 한다.

그러나 낙엽의 정다운 시각적 특성과 달리 모양은 쓸쓸하다는 정서의 이중성을 가진 이미지로 그려낸다. 낙엽이 ‘영혼처럼 운다’는 것은 의인화를 통한 인간 존재 탐색의 담론임을 알게 한다.
‘낙엽 밟는 소리가 좋으냐’고 하는 것은 역으로 단순한 낙엽의 자연현상이 아니다. 가을로 비유한 존재의 새롭고 깊은 명찰을 하게 하는 질문과 답임을 깨닫게 해준다. 따라서 ‘밤이 오고 바람이 분다’는 의미도 낙엽이 가지는 절기를 통한 인생의 때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도 때란 시계나 달력으로 계산되는 시간이 아님을 말해준다. 카를로스가 아닌 카이로스의 시간임을 말한다. 즉 가을과 낙엽은 절기적인 이미지 동원이다. 낙엽은 ‘우리도 언젠가는 낙엽이니’라는 구체적인 진술을 보면, 인생론을 말하려고 의도적으로 기획하고 제작한 객관적 상관물인 것이다.

이 시가 누구에게나 감동을 주는 것은 공감각을 동원하여 존재의 깊은 의미를 탐색하게 해주는 탁월한 미학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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