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찬밥 한 덩이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겨울 냇물에서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배부르다 생각없다 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발 뒤꿈치 다해져 이불이 소리를 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손톱을 깎을 수조차 없이 닳고 문질러져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화내고 자식들이 속 썩여도 전혀 끄떡없는

외할머니 보고 싶다.
외할머니가 보고 싶다 그것이 그냥 넋두리인 줄만-

한밤중 자다 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 죽여 울던 엄마를 본 후론
아!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 문현미 교수.

사람답게 잘 사는 것이 무엇일까. 이것은 삶의 질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리는 물질이 풍요한 시대를 살고 있다. 하지만 물질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풍부한 물질을 누리면서 정신적으로는 더 빈곤한 삶을 살기도 한다. 세계 4대 시성이라 불리는 독일 문호 괴테도 일생 동안 행복했던 시간은 겨우 17시간이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만큼 행복한 삶을 살기가 무척 쉽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신명기 8:3)는 성경 말씀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모든 생명체는 먹어야 산다. 오랫동안 굶으면 다른 어떤 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우선 먹는 문제가 해결되어야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되었다 할지라도 인간에게는 늘 허기가 따른다. 그것은 정신적 허기가 채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육체의 밥뿐만 아니라 정신의 밥도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엄마는 이런 육체의 밥을 먹지 않고도 배부를 수 있는 존재이다. 마른 논에 물 들어가는 것과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부르다는 옛말을 보아도 그렇다.

이 시는 바로 그런 엄마에 대한 인식과 아우라를 깨트린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시적 화자는 엄마에 대한 자신의 인식이 잘못 되었음을 깨닫는다. 엄마가 죽어라 힘들게 일을 해도, 대충 끼니를 때워도, 심지어 식구들 다 먹이고 굶고 있어도 되는 줄 알았다는 것이다. 얼마나 어리석고 못난 자식인가를 돌아보게 한다. “아버지가 화내고 자식들이 속 썩여도 전혀 끄떡없는” 원더우먼의 엄마도 희노애락의 감정을 지닌 한 인간이라는 것을 철부지 자식은 몰랐다. 하지만 이런 엄청난 능력을 지닌 엄마가 한밤중에 몰래 눈물을 흘리시는 것을 본 시적 화자는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비로소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엄마의 깊고도 넓은 사랑을 깨닫는 순간이다.

심금을 울리는 진정성으로 인해 시를 읽는 독자의 가슴에 잔잔한 파문이 인다. 이 시는 “엄마는/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라는 1,2행을 각 연마다 반복함으로써 음악성을 잘 살려내고 있다. 미학적 반복을 통해 독자들을 지속적으로 시의 틀 안으로 견인한다. 마지막 연에서 진실을 토로함으로써 반전의 묘미를 배가시킨다. 시인의 숨결과 자전(自傳)이 시가 된다는 어느 시인의 말이 떠 오른다. 심시인이 온몸에서 길어 올린 엄마에 대한 사랑의 고백이 자식인 우리 모두의 혈관을 타고 흐른다. 그래서 좋은 시는 정신의 밥이 되기도 한다. 진솔함이 사람의 빗장을 열게 하는 최고의 열쇠인 것을...

백석대학교 교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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