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중 곤 목사

“못하는 설교는 뒤로 하고 27년 동안 교회 청소와 화장실 청소를 하신 설교전문 목회자가 아닌 미화전문 목회자였던 나의 아버지, 장단 맞춘다고 27년간 교회의 부엌일을 하셨던 어머니, 그분들이 이제는 자랑스럽다. 나의 아버지 어머니란 말로도 가슴 벅차다”

이 글은 이름도, 빛도 없이 평생 시골교회를 섬기다가 은퇴하는 원로목사의 아들이 아버지에게 드린 축하의 글이다.

이 글이 조선일보에 실리면서, 세습과 맘몬, 막말 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한국교회와 국민들에게 진한 감동을 주고 있다. 이 글은 오늘 한국교회 목회자의 삶과 목회자 자녀의 삶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고 있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머슴과 다를 바 없다. 교인들의 눈치를 보며, 각기 다른 성격을 가진 교인들의 비위를 맞추며, 하나님의 선교적 사명을 감당한다. 그래서 목회자는 교인들이 이리 치면 이리로 쓰러지고, 저리 치면 저리로 쓰러진다.

그래도 목회자인 자신은 부인에 비하면 사정이 나은 편이다. 목회자 부인은 ‘사모’라는 허울 좋은 이름아래 자신의 위치도 없이, 이 글이 말하고 있듯이 교회의 굳진 일을 도맡아 한다.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항상 마음을 조이며, 목회자의 조력자로서 평생을 봉사한다. 그렇다보니 목회자부인은 일반인보다 스트레스에 시달려 위장병 등을 얻어 일찍 사망한다.

그래도 목회자와 목회자부인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부귀영화 등 그 무엇보다 크기 때문에 모든 것을 감내하며, 주어진 상황에 감사한다. 항상 교인들의 눈치를 보며, 하나님의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는 아버지와 엄마를 보면서 성장한 목회자의 자녀들은, 마음을 조이면 힘겹게 자랐다. 그래서 많은 목회자의 자녀는 교인들에 대해서 적재적이며, 부모의 뜻과는 상반된 길을 걷는다.

목사 아버지와 엄마는, 아들이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기를 소원하지만, 가난과 원망 속에서 자란 아들은 아버지 하나로 마감하기를 바라며, 곁길로 간다. 그래도 부모의 기도가 있었기 때문에 바른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 최소한의 양심도 지킨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그 무엇보다도 크다는 것을 안다. 이 글에서 말하고 있듯이 목회자가정의 삶과 고통은 목회자가 아니고서는 견뎌낼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릴적 광역시의 명문중학교에 합격하고도, 가난한 환경 때문에 진학을 포기했던 일, 생활비 만원 남짓한 돈으로 5가족이 살아야 했던 이야기, 원인 모를 설사병으로 죽음 직전까지 가야했던 이야기, 주스를 먹고 싶다는 아들에게 설탕물을 타 주었던 아버지, 새벽기도를 드리기 위해서 온 어느 교인이 부엌에 갔다가 놓은 고구마 몇 개로 한 끼 식사를 때워야 했던 목회자 자녀는 가난이 실어서, 아버지를 괴롭히는 교인들이 실어서 목회자의 길을 포기했다.

이 글은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한 번도 가족끼리 삼겹살 외식도 못한 가족사를 담담하게 전하고 있다. 아버지도 한 때 유창한 설교로 교회를 성장시키겠다는 꿈도 꾸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항상 평범한 설교를 하는 시골의 작은교회를 27년 동안 섬겼다. 아버지는 퇴직적립금도 중간에 정산해 전액을 교회건축을 위해 헌금하고, 은퇴하면서도 교회에서 빈손으로 나오고, 오히려 헌금을 더하지 못해 죄스러워하시는 가난한 목사로 아들의 눈에 비쳤다.

30년 전 운전면허를 따고 좋아했지만, 결국 티코도 한 번 운전해 보지 못한 아버지였다. 이런 목사가 길러낸 아들은 첫째가 세계 1위라고 하는 S전자의 책임연구원, 둘째 아들은 전문의 의사, 셋째 아들은 한의사가 되었다. 아버지 목사와 자녀들은 세상의 그 어느 것보다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크다는 것을 알았기에, 이름도, 빛도 없이 시골의 작은교회를 섬기며,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아버지의 은퇴를 축하했다.

예장 합동총신 총회장•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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