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 인 찬 목사

말씀을 매일 묵상하고, 그 말씀을 삶으로 우려내면 말씀이 나의 성품의 씨앗 되어 주님을 닮도록 인도해 줄 것이다. 주님을 닮은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하지만 이것이 목표는 아니다.)

산상수훈의 이 팔복은 예수님이 누리시는 행복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심이다. '내가 이렇게 행복한데 너희도 행복하라.'는 주님의 마음이 이 팔복의 말씀에 담겨 있다.

'복이 있나니'는 감탄사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의 행복이여! 온유한 자의 행복이여!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의 복 됨이여!' 하는 말씀과 같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얼마나 행복한지 아는가? 화평케 하는 생활이 얼마나 행복한지 아는가? 그 행복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이다.' 이 감탄과 감격이 이 말씀 속에 있다.
'복이 있나니' 의 헬라어 '마카리오스'(makarios)는 사람들의 행복을 말하는 단어가 아니다. 하나님의 행복(즐거움)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용어이다. 그러므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나니'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행복은 하나님이신 예수님 자신의 행복을 말씀한다.

이 말씀을 주시는 것은 '내가 누리는 복을 너희도 누리라.'는 주님의 심정이다. '너희도 심령이 가난하면 나처럼 복 될 수 있다.' 는 주님의 뜻이 이 말씀에 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면 너희도 나처럼 복 될 수 있다.'는 주님의 마음을 말씀에 담고 있다.

예수님은 육신으로 세상에 계실 때 너무나 고난과 고통스러운 날들을 사셨다. 그만큼 가난하셨고, 그만큼 사람들에게 핍박을 받으셨으며, 그만큼 고통을 체휼(體恤)하셨으나 어떤 고난 속에서도 주님은 잃어버리지 않은 것이 심령의 복이다.

우리가 이 심령의 행복을 소유할 수 있으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자일 것은 자명하다. 만일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사람에게서 그 행복을 누가 앗아갈 수 있는가? 눈물 흘리도록 아프고, 슬퍼하고, 애통함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사람에게 그 행복을 누가 빼앗을 수 있는가? 이 세상은 힘이 있고, 큰 소리를 쳐야 이기고, 온유하면 지거나 손해를 본다.

온유함으로 손해를 보면서도 행복한 사람의 그 행복을 누가 빼앗을 수 있는가?

예수님이 주시고 싶어 하시는 복은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빼앗을 수 없는 오직 하나님으로만 누릴 수 있는 행복이다. 이 복된 마음을 주님이 가르쳐 주신다.

미국 독립선언문에 명시된 바처럼 인생은 누구나 자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졌다. 우리는 다 행복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신다.

사람들은 행복을 위해서 일한다. 마치 인생의 목표가 행복을 얻는데 있는 것처럼 산다. 하지만 행복을 추구하는 방법과 길이 잘못 되었다.

아그네스 레플리어(1855~1950, 미국 수필가)는 '우리 안에서 행복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내 밖에서 행복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사람들은 밖에서 행복을 찾는다. 자기 밖에 있는 그 무엇을 통해서 행복이 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맹자는 인생을 재미있고 행복하게 하는 것은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과 성(性)을 즐기는 것이라고 말한바가 있으나 벌써 길을 잘못 들었다. 돈이 행복을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길을 잘못 들었다. 명예와 권세가 행복을 줄 줄 알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눈에 불을 켜고 쫓아다니나 길을 잘못 든 자의 생각이다. 나의 행복은 돈과 명예가 주었다고 말한 사람이 있는가. 심지어 솔로몬까지도 세상의 그 무엇도 결국은 헛되다고 말했을 정도다. 사실 그것들이 행복을 주지 못한다. 만약 이런 저런 것들이 행복을 주는 것이라면 선진국에 사는 부요한 사람들이나 건각들은 벌써 무릉도원에서 행복한 인생을 구가하며 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선진국일수록 자살하는 사람이 많은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아스피린과 진통제로 밤을 보내고, 진정제나 수면제를 먹어야 자는 사람이 그토록 많은 이유가 무엇일까? 이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다 손에 넣어도 그것이 행복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한 웅변적 증거다.

<다음호에 계속>의왕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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