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 태 영 목사

인간의 생존은 다른 피조물과의 의존관계를 벗어날 수 없다. 혼자서는 못사는 존재가 인간이다. 속세가 어지러워 깊은 산 속에 들어가 고독하게 지내는 수도승이라 할지라도, 그가 필요로 하는 생존의 양식과 도구들은 다른 존재로부터 얻은 것이다. 다만 그는 그것을 생산하고 제공하는 존재들을 대면하지 않을 뿐이다. 이 상호 의존적인 생존양식 안에 평화를 깨뜨리는 악마적 독소가 있다.

평화를 깨뜨리는 모양도 다양하다. 인간의 의존적인 생존양식을 ‘적극적으로’ 파괴시키며 생존하는 이들이 있다. 너와 나 ‘사이’를 ‘분리’시키고 그 부산물을 따먹는 기생충 같은 이들이 있다. 그들은 ‘분쟁’을 일으키기 위해 학습 받은 전문가들이다. 거짓 평화는 항상 이들에 의해서 조장된다. 세상이 희망을 상실하면 이들은 기회를 맞이한다. 도둑이요 강도요 살인자들은 다른 사람의 불행의 부산물을 따먹는 기생충들이다. 어두운 시대는 이들이 가장 호황을 누린다. “그는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엡 2:14) 예수의 십자가는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려는 하나님의 마지막 수단이다. 나만 살기 위해서 다른 피조물과 동료 인간을 ‘그것’으로만 대하는 차디찬 가슴에 사랑의 불을 지피신 것이 십자가 사랑이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저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릴 것이다.”(마 5:8, 시 85:10-13) 성서에서 하나님의 자녀 됨의 직접적인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와만 관련된다. 예수께서도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기는 했어도 ‘내가 곧 하나님의 아들이다’고 말씀하지는 않았다. 하나님의 아들 됨이 이렇게 조심스러운 이유가 있다. 하나님의 아들 됨은 하나님과 ‘동등 됨’을 언표하고, ‘상속자’임을 증거하며, 그리고 자신이 ‘메시아’임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이 기회 있을 때마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냐?”고 추궁했어도 “그렇다, 내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다”고 대답하지 않은 분이다. 고난의 십자가로 인해 비로소 아들 됨의 은총을 입은 분이다. 이처럼 평화는 십자가와 분리시킬 수 없다. 평화는 ‘나’의 생존과 관련된 ‘이웃’들, ‘피조물’들 그리고 우리가 ‘적’으로 단정하는 ‘그들’을 사랑하는 데서 착상된다. 평화는 십자가 밖에서는 기대할 수 없다. 평화는 본질적으로 공동체적이다. ‘나’와 ‘너’와 ‘그것’이 하나님과 함께 있음으로 충만해지는 샬롬이다.

삼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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