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 태 영 목사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시 51:1) : 세상에 죄 없이 태어난 사람은 없다. 죄 지으며 살지 않는 사람 없다. 사람의 사람됨은 바로 죄 ‘있음’에서 비롯된다. 그러기에 시인은 항상 ‘그’가 아니라 ‘나’가 문제가 된다.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라고. 죄가 있기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계시기에 또한 죄가 있다. 하나님 없는 곳엔 죄도 없다. 자비는 늘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자리 잡고 있다. 죄인은 하나님의 자비로 세례를 받아야 한다. 자비는 하나님을 뵈올 수 있는 통로이다. 진홍처럼 붉은 죄 흰 눈처럼 씻겨 주시는 ‘바이오 액정세제’가 자비이다. 십자가 보혈은 죄인을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도록 부르시는 보증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비로우신 사랑이다. 결코 강요하지 않는 사랑이다. 봄비가 마른 땅을 촉촉이 적시며 스미는 것처럼, 요란스럽지 않으면서도 영혼을 감동시키는 사랑이다. 그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 그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그의 마음에 감응하는 사랑이다. 극진히 존중하며 깊은 신뢰 속에서 우러나는 마음이 자비로움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연민의 마음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결코 상대를 불쌍히 여기거나 내 편의를 위해 동정하는 천박한 사랑이 아니다.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 예수께서는 단순히 자비(긍휼)의 모범을 보이신 분이 아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입은 자비를 아직 하나님의 자비를 알지 못하는 세상에 되 베푸신 분이다. 우리는 칭찬 받기 위해서 자비를 베풀어서는 안 된다. 인간의 행위에는 자신을 빛내려는 교만이 자리 잡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독소가 있다. 자기를 빛내려는 자비는 ‘그들’을 내 안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내 밖에 있는 ‘대상’으로만 인식한다. 그리하여 욕구가 충족될 때는 ‘내 편’으로 인식되지만 기대가 어긋날 경우에는 ‘적’으로 간주된다. 사회적 자선 행위들이 항상 두 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하나님 없는 자비는 ‘적과 동지’라는 모순을 공유하고 있다. 남과 북이 대치되어 있는 오늘의 상황에서도 이 도식은 여전히 위력을 발휘한다. 통일의 논리에서 갈등을 빚는 것은, 한편에서는 ‘동포’라는 인식에만 집착하고, 다른 편에서는 ‘적’이라는 인식에만 집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인식은 수시로 뒤바뀌고 있음을 유념할 일이다. 자비로운 사람이 복이 있다.

삼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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