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팔자

속을 다 털어낸 밤송이들이  
묵정밭 비탈에 편히 앉아
입이 찢어지게 웃는다.

온몸에 가시 곤두세우고
꽉꽉 속을 채우던 
알밤들은 다 어디에 내버렸나.

게걸스런 다람쥐가 울고 갈 판이다.

* 감태준 :
1972년 《월간문학》 신인상. 시집 『역에서 역으로』 『마음이 불어가는 쪽』 등 중앙대학교 전교수

▲ 정 재 영 장로
시인은 밤송이를 의인화 시켜 상팔자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밤톨을 모두 버리고 난 후의 찢어진 그 모습이 상팔자와 같은 표정으로 보인다는 말이다. 밤알을 다 털어낸 가시만 있는 밤송이를 팔자가 좋은 사람의 웃는 입으로 변용해 두었다. 그것도 묵정밭이라는 용도가 폐기된 장소와 알밤을 다 버린 후 쓸모없어진 밤송이 껍질의 동일한 처지를 중복시켜 강조하고 있다.

2연에서 그 연유를 해명하고 있다. 밤송이는 밤알을 키워내는 사명을 가졌다. 키우는 동안 밤알을 지키려고 가시를 온몸에 곤두세웠다고 하는 것은 밤송이의 치열했던 삶의 모습을 말해준다. 그렇게 키운 밤알이 어디로 간지 모르지만 그 사명을 다 마친 밤송이는 만족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버림과 비움에서 오는 가벼움이 주는 만족의 심리를 말하려 하는 것이다.

마지막 연에서 밤알을 주어먹는 다람쥐는 밤알을 얻었을 때 매우 만족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밤송이가 더 상팔자 웃음을 짓고 있다는 표현은 탐욕(식탐)으로 가득한 다람쥐와 비교되는 밤송이의 새로운 인식을 보여준다.

목적을 달성함으로 속을 털털 버리는 비움의 미학, 어쩌면 시인은 밤송이의 찍어진 모습을 웃는 모양으로 연결하여 보았을까. 이 면이 기발한 착상(conceit)을 동원하고 있는 면이다. 이런 새로운 상상이란 늘 새로운 시각으로 새롭게 해석하는 능력에 의하여 결정된다.

한발자국 나아가 연상해본다면, 버림의 인식은 종교와 같이 비움에서 오는 치유의 심리 기전으로 다가와, 이 작품을 읽는 독자에게 동일한 치유의 단계를 마련해주고 있다. 삶을 마칠 때 인간도 마찬가지다. 그처럼 평생 보듬고 온 결실까지 버림에서 오는 가벼움은 문학목적론 중 하나인 미학적 치유기전의 노리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은 문학의 기원인 유희론과 교훈론을 동시에 만족시켜주고 있다.

전 한국기독교시인협회 회장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