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헌철 목사
‘아드리안’(Adrian)은 ‘트라얀’으로부터 왕위를 계승한 후 그에 뒤지지 않는 심한 박해를 가하였던바 이를 두고 기독교 역사에서는 네 번째 박해로 기록 한다. 이 시기에 로마의 목자였던 ‘알렉산더’(Alexander)가 두 명의 집사와 함께 순교 당하였다고, ‘귀리누스’(Guirinus)와 ‘헤르네스’(Hernes)도 가족들과 함께 처형되었으며 로마의 귀족이었던 ‘제논’(Zenon), 이외의 약 만여 명에 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처형을 당하였던 바, “아라랏(Ararat) 산”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고난 때와 같은 방법으로 가시 면류관을 쓰고 창으로 옆구리를 찔리며, 십자가에 매달린 상태로 순교를 당하기도 하였다.

이 때, 용맹스럽고 유능한 로마인 사령관이었던 ‘유스타키우스’(Eustachius)는 황제로부터 그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다며, 우상숭배 자들의 제사에 참석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그의 믿음은 매우 신실했기(그는 마음속으로는 그리스도인이었다) 때문에 그 명령을 단호히 거부하게 된다. 이에 격분한 황제는 이 유능한 사령관의 공적을 잊어버린 채 그와 그의 모든 가족들을 처형하고 말았다.

또한 ‘브레시아’(Braescia)시민이었던 ‘파우스틴’(Faustines)과 ‘요비타’(Jovita) 형제의 순교는 특히 극심한 고통이 동반되었으나 그들의 인내심은 놀라운 것이었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이들을 본 이교도 ‘칼로세리우스’(Calocerius)라는 사람은 감탄과 경이감(驚異感) 속에서 고백 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하나님은 위대하도다!”라고, 이로 인하여 그도 체포를 당하게 되었고 결국 그들과 같은 죽음을 맞이했다.(출처 : 기독교 순교사)

작금에 우리들의 현실은 어떠한가? 과연 우리들을 바라보며, ‘칼로세리우스’(Calocerius)와 같은 감탄과 경이감(驚異感)으로 대하거나 표하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따라서 “오늘날 교회를 찾거나 배척하는 사람들의 목적이나 이유는 동기는 무엇일까?”하는 생각을 해 본다.

물론 다중의 그리스도인들이 긍정, 낙관, 번영, 성장, 부흥 등 수많은 희망의 찬가를 외치는 순간, 우리는 진정한 희망은 상실해 가고 있다고들 한다. 그러나 그 무엇이라도 감추는 것이 미덕이며 ,신앙으로 생각하는가 하면, 교계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일 앞에서도, 업적만을 내세우며 옹호하는 등의 행실이, 성경이 증거 하는 하나님의 뜻이며 신앙적이라고 외친다면, 교회 밖의 사람들은 과연 무엇이라 할까?
물론 죄란 크고 작음이 없다 할 것이다.

그러나 고의나 크게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 아니고는 그 누구도 크게 말하거나 항의(반항)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으로도 큰 논란거리가 되거나 하나님의 뜻이 왜곡 된 업적이나 공로를 영웅시 하며, 그와 유사한 일들을 더 크게 부각시킨 다면 성도들로 부터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진정성 있는 동의를 얻어낼 수는 없을 것이다. 함에도 불구하고 작금의 교계는 “내부고발 자”와 같은 일이 발생 되면 지옥이라도 가라고 저주하며, 그들과 머리를 맞대고 기도하거나, 진정성 있는 대화마저 거부하는 모습 속에서 과연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을까?

따라서 인간의 사사로운 생각을 성경의 권위 위에 두고 신앙이라고 들어내기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 무엇인가를 심도 있게 고민해 볼 수는 없는 것일까? 우리가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 호령하는 일은 없지만 자못 우리 밖에 있는 이들에게 그렇게 비쳐 지는 것이라 한다면 한번 쯤 스스로를 돌아보며 조용히 무릎을 꿇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자세가 아닐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찌어다(벧전 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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