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 인 찬 목사

미국과 유럽에서 노예해방이 되고난 뒤에도 노예였던 사람들이 여전히 노예처럼 살았다고 전한다. 우리네도 사실 그랬다. 종으로 살던 사람이 세상이 변하여 종의 신분을 벗었으나 옛 주인을 떠나지 못하고 스스로 주인 집안의 대소사를 챙기며 그 집의 아랫것으로 살았다.

과거 노예(아랫것)생활에 익숙해 있고, 자유인이라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하고, 또 자유가 오히려 어색하고, 부담스럽기도 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유인으로서의 새로운 자기 신분에 대한 의식화이다.

생명으로 충만한 인생을 사는 셋째 열쇠는 다시 산자로서 드리고 사는 것이다.

로마서 6:11은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고 살아야 한다는 교훈으로 끝내지 않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자로 살아야 한다고 교훈한다. 내가 다시 산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살게 되었다고 의식화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바울사도는 또 그의 교훈을 단순한 의식화의 권고로 마무리하지 않는다. 이 승리의 삶을 한마디로 하면 '드리라'이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6:13) 우리 몸을 죄의 목적에 드리지 말고, 하나님의 목적에만 드리라는 것이다. 우리 몸이 죄짓는 일에 쓰이면 죄의 도구요, 의로운 일에 쓰이면 의의 도구가 된다.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신 이유는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의로운 도구가 되게 하려는 의도다.

거룩은 무엇을 안 하는 것만이 아니다. 거룩은 손과 입과 몸으로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것이다. 죄를 안 지으려고만 하지 않고, 거룩한 아버지의 일에 자신을 드려 열중하는 것이다. 자신의 시간과 존재를 하나님의 일에 드려 거룩을 도모해야 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삶의 진정한 기쁨을 누리는 것이 거룩에의 삶이다. 영혼을 돌보고, 전도하고, 기도와 찬양으로 주 앞에 나가야한다. 자신을 내어주고 이웃을 섬겨보라. 그때 비로소 세상이 결코 제공하지 못하고 제공할 수 없는 그 기쁨의 인생을 다시 살게 될 것이다. 우리의 인생은 싱싱한 장미꽃처럼 새롭게 피어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주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신 사신 이유이다.

미국의 후버댐(Hoover Dam)은 애리조나주와 네바다주 경계의 블랙 협곡에 위치한 댐으로, 콜로라도 강을 막아 만든 댐이다. 1931에 공사를 시작하여 1936년에 완성된 후버댐은 당초 ‘볼더 댐’(Boulder Dam)으로 불렸으나, 1947년 미국 제31대 허버트 후버 대통령을 기념하여 ‘후버 댐’으로 명칭을 변경하여 오늘에 이른다.

이 댐의 공사는 토목건축사상 랜드 마크로 불린 대 공사였다. 이 공사로 아름다운 미드(Mead)호수가 생겨났고, 남 캘리포니아 전역에 전력을 공급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거친 사막에 세계적인 오락도시 라스베이거스가 태어날 수 있었다.

이 후버댐에 관광차 갔을 때 댐 입구에 세워진 안내판에서 감명 깊은 한 문장의 글을 읽었다. 거기에는 이 엄청난 공사 중에 희생당한 112명의 명단이 새겨 있고, 그 아래 "이들이 희생당한 이유 - 사막에 장미꽃이 피어나고, 골짜기에 생명의 강이 흘러가기 위해서였다"고 적혀 있었다.

이 글을 대하면서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가신 갈보리 언덕이 연상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그가 여기 골고다에서 생명을 희생하신 이유는 허다한 인생의 사막에 다시 장미꽃을 피어내고, 사망의 골짜기에 생명의 강이 흘러가기 위해서였다"고 인용하고 싶었다.
 

참 인생을 살고 싶다면 유일한 구원의 길, 십자가 앞으로 나가야 한다. 거기서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예수를 바라보고 그 예수님과 함께 죽은 나 자신을 보게 되면 우리는 이제 새로운 삶을 살 준비가 된 자이다. 우리 구주 예수께서 그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장사되신 그 무덤에서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사셨기 때문이다. 그 예수 구세주 때문에, 그 십자가 때문에 나도 새 인생을 사실 수 있게 되었다.

부활(復活)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남이다. 죽음(死亡)이 전제되지 않는 부활은 없다.

우리는 다시 살기위해 죽는다. 하지만 다시 사는 것에 대한 부활신앙이 없으면 결코 죽을 수 없으며 죽지 못했기에 다시 살지 못한다.

의왕중앙교회 담임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