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동규 목사.

손정도 목사는 1882년 7월 26일 평안남도 강서군 증산면 오흥리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1902년 과거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평양으로 가다가 날이 저물어 한 가정에 투숙하게 되었다. 바로 그 집이 조씨 성을 가진 목사가 사는 집이었다. 손 목사는 조 목사의 전도로 기독교를 접했다. 손 목사는 평양서 집으로 돌아와 집안 대대로 유교를 믿으며 방에 모셔왔던 사당을 부수어 버렸다. 유교에서 기독교로 종교를 바꾼 것이다.

그 이후에 손 목사는 평양주재 미국감리교회 선교사였던 문요한의 비서 겸 한국어선생으로 일하면서 1905년에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여 1908년에 졸업했다. 손정도 목사의 부인인 박신일은 남편의 학비를 마련하고, 두 딸인 진실과 성실을 양육하기 위해 평양기독병원에서 일했다. 손 목사는 1909년 기독교 감리교회에서 운영하는 신학대학인 협성신학당을 졸업하고, 평양 남산현교회와 진남포교회를 맡아 목회했다. 남산현교회는 미국 의료선교사인 더블유 제이 홀 선교사에 의해 1893년 4월에 평양에 세워졌다.

남산현교회는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에 장로교의 장대현교회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기독교의 선교중심으로 부각되었고, 이 부흥운동을 거치면서 남산현교회의 교인 수는 3천명을 넘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손 목사는 남산현교회에 부임한 것이다. 남산현교회는 1919년 3·1운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이 교회 신홍식 담임목사는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었고, 박석훈 부목사는 3월 1일 8백여 명의 교인들과 함께 교회에서 고종황제 봉도식과 독립선언식을 갖고,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됐다.

11월 15일 고문으로 옥중에서 사망했다. 손 목사의 맏딸인 진실도 남산현교회 신도였던 김세지, 박승일, 오신도, 박현숙 등과 함께 1919년 11월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중국 상해에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독립운동가들을 돕다가 1920년 10월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했다.일제의 침략으로 많은 사람들이 만주로 이동하면서, 한국기독교는 만주지역에 조선인들을 위해 선교사를 파송해야 했다.

손정도 목사가 미국 감리교 한국인 파송선교사가 됐다. 중국 베이징과 안동, 길림 등 간도지방을 담당한 순회 전도사로 활동했다. 손 목사는 그 당시에 중국 베이징에서 신민회 핵심이었던 안창호 선생을 만났다. 3.1만세운동 이후 손 목사는 3년간 상해 임시 의정원 의장을 맡아 독립군 무기기금 모금운동을 벌렸다. 박은식과 함께 대한교육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대한적십자회 상임위원도 역임했다.

이밖에도 손 목사는 1920년에는 안창호 선생과 함께 흥사단 극동임시위원회를 조직, 1921년에 길림에서 농민합작사 설립해 항일부장투쟁의 기반과 민족대동단결에 총력을 기울였다. 손 목사는 중국 만주지방에서 선교활동과 독립운동을 벌리기 위해 중국어공부도 열심이었다. 중국인들에게도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길림에 한인교회를 개척했다. 손 목사의 인간사랑은 동포들을 신앙으로 위로 하고, 억울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일로 이어졌다.

손 목사는 뛰어난 웅변술과 준수한 용모, 진심이 담김 언행으로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민족의 독립과 해방이 복음선교의 일부라는 선교관에 따라 이르는 곳마다에서 애국심을 불러일으켰다. 일제는 애국심이 강하고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손 목사를 요시찰 인물로 지목하고 감시를 강화했다. 1910년 12월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 사건으로 손 목사는 ‘105인 사건공모자’로 체포되었다.

1년의 감옥살이를 마치고 추방되어 전라남도에 유배형을 강요당했고, 그 이후에 서울에 있는 정동교회 6대 담임목사로 부임되었다. 당시 정동교회의 목회대상자는 주로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학생들이었다. 이는 청년들이 많이 출석하는 교회로서 손 목사의 교회활동은 청년운동과 연계되는 계기가 되었다. (탈북자 김주원의 <북한의 종교-김일성과 손정도 목사> 참고)

예장 개혁선교 부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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