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재 성 교수

4) 목회자들이나 교회 지도자들이나 지난 날 자신들의 수고와 업적을 자랑하면서 특권층을 형성해서는 안된다. 지식주의, 권위주의에 사로잡힌 목회자들이 총회, 노회, 당회에서 패권주의로 비쳐진다면 성도들과 세상은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다. 교단은 세속적인 의미에서 정치적인 조직으로 변질되어가는 경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선교연합 단체, 전국적인 교단의 총회, 기독교 연합기관, 신학교 이사회 등에서 일부특수층만이 패권주의로 결탁해서 부패를 조장하기도 한다. 일부 목회자들은 기득권 세력층을 형성하여 패거리 행동을 하고 있다.

우리 한국교회에서는 언제부턴가 개척한 목사가 교회를 자기 소유의 기업으로 생각하는 사업가적 발상이 자리를 잡았다. 가난하고 척박한 곳에서 열심히 수고하여 목회를 이뤄낸 분들이 많다. 큰 교세를 크게 성장시켰고, 안정된 교회로 발전시킨 공로는 높이 존중을 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그런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이 비판하거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들으려 하지 않는 아집에 빠져버리는 것이다. 목회적 활동을 오직 충성주의자들과만 함께 하는 것은 부패한 관행을 정당화하는 결과가 빚어지게 된다.

5) 교회 지도자들은, 목회자들이든지 평신도들이든지 더욱 더 낮아지고, 겸손해져야만 한다. 종교개혁자들은 설교자의 소명을 다하고자 노력하되, 자신들의 역할과 지위에 대해서 철저하게 겸손한 자세로 임하였다. 종교개혁자들은 설교자의 역할에 대해서 “왕의 대사”에 불과할 뿐이라고 자신의 지위를 확실히 이해하고 있었다. 대중전달 매체들이 급속히 발달함에 따라서 인터넷의 신속성이 더해졌고, 설교를 아주 잘한다는 “유명 목사,” “인기 목사”가 자랑거리로 등장하였다. 설교자의 외모에 대한 평가가 혼돈을 부채질 하고 있다. 누가 얼마나 말을 얼마나 설교를 잘하느냐, 설득력 있게 표현하는 재능이 있느냐, 또는 웅변술로 포장된 호소력이 있느냐 등은 결코 설교자의 본질적인 헌신과는 무관한 것들이니, 속지 말아야 한다.

성도의 숫자에 따라서 목사의 능력을 평가하는 척도가 되고 있다. 심지어 성경만을 강해하는 설교를 한다고 자랑하는 교회에서조차도 “아무개 목사의 교회”라는 말을 즐겨 사용한다. 이것이야말로 칼빈과 종교개혁자들이 거부했던 일이다. 개인 목사의 우상화라고까지 할 만큼, 인기스타처럼 사람들의 갈채를 받고 등장하는 목회자들이 자신의 이름과 명성을 마케팅 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사람이 화려하게 찬사를 받으려하는 부패한 인간성의 야욕이 무너져야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런 것은 일반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어떤 교회에 소속되었느냐 하는 것은 그 성도의 내적 신앙성숙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떤 성도가 큰 교회를 섬긴다고 해서 더 작은 교회에 봉사하는 성도보다도 훌륭한 기독교인이다고 말할 수는 없는 법이다. 기독교 신자들은 결코 허망한 엘리트주의에 사로잡혀서는 안된다.

미국 시카고에 있는 트리니티 신학대학원 마네치 교수는 제네바의 목사단이 순회설교를 원칙적으로 지켰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제네바 시의회와 목사단은 주일마다 설교자들이 각 교구 교회를 순회하여 설교하도록 규정했다. 칼빈도 예외가 아니었다. 통상 15명의 제네바 소속 목회자들은 어느 누구도 특정한 교회를 자신의 목회지로 한정하지 않았다.

<계속>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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