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 태 영 목사

나사렛 예수는 세상으로부터 철저하게 부정된 자의 표상이다. 그 부정된 자가 죽은 영혼을 살려내고, 부패한 세상을 살려내는 기적을 일으킨다. 그렇다면 그가 일으키는 기적이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를 짐작해만한 기사가 있다. “새벽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 1:35): 사람들은 이 기사를 통해 예수께서는 기도를 게을리 하지 않으신 분으로 해석한다. 많은 목회자들이 새벽기도를 독려하는 기사로 활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기사는 예수께서는 기도를 게을리 하지 않으신 분임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의 인격과 그가 행하는 모든 권능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말하려는 것이다.

마가는 예수께서 일으키신 치유 이야기들 가운데 흥미로운 이야기 하나를 소개하고 있다. 시몬 베드로의 장모를 고친 이야기다.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웠는지라”(막 1:30). 그녀의 열병이 세균성인지, 바이러스성인지 알 수 없으나 짐작해볼만한 게 없지는 않다. 딸을 시집보낸 어미로서 바라는 게 있다면, 사위라는 자가 딸을 호강은 못시킬망정 굶어 죽게는 않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사위라는 자가 생업은 팽개치고 온 세상을 소란케 하는 예수라는 자에게 미처 돌아다니고 있으니, 속에서 열불이 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자신의 열병을 낫게 한 분은 사위를 꼬드겨서 제 정신이 아니게 만든 바로 그 사람 예수이다. 세상이 부정하고, 자기 또한 부정했던 이가 자신의 병을 고쳐주다니 이보다 더 큰 역설도 없다.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문에서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향해,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라”(행 3:6)고 한다. 이 또한 기막힌 일이다. 나사렛-예수-그리스도. 이 세 마디는 당시 종교와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부정된 이름이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은 그것도 예루살렘성전 어귀에서 거침없이 그 이름을 발설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집을 사주신 것도, 직장을 마련해 주신 것도 아니다. 다만 당신의 ‘이름’을 주셨을 뿐이다. 믿는 이들은 이 일을 기억해야 한다. 사람들은 성전 문어귀에서 구걸하는 맹인처럼 무엇인가를 달라고 요청하지만, 예수께서는 그 모든 것인 당신의 이름을 주신다. 당신의 인격과 능력과 삶을 주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예수께로부터 자신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과 인품과 삶을 선물 받은 이들이다.

삼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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