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 헌 철 목사

올리버 크롬웰(영어: Oliver Cromwell, 1599년 4월 25일 - 1658년 9월 3일)은 영국의 정치가이며 군인이다. 청교도 혁명으로 영국의 군주제를 폐한 1658년 9월 3일부터 죽을 때까지 대통수(호국경)으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를 다스렸다.

그의 업적은 기독교 전파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다양하게 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선 왕당파와의 전투 당시 직업 군인 대신 농민들을 소집했는데, 비록 전문 병사는 아닐지라도 일단 겁주고 협박하였으며, 병사들 이상으로 더 치열하게 싸울 것이라고 판단 군에 의한 독재 권력을 행사 했다. 그러나 죽은 후에는 찰스 2세의 명령에 따라 효수하기 위해 머리를 자르는데 30번이나 내리쳐짐을 받았다고 한다.
 

크롬웰은 아일랜드 인을 학살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이때 적의 적은 우군이라는 말에 의한 것 같이 ‘북부 이슬람교’와 손을 잡기도 하였다.

또한 1653년 4월 20일. 대통수(호국경) 크롬웰은 하원으로 들어가서 자기 의석에 자리했다. 그는 귀를 기울여 듣다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며 자리에서 일어서 외쳤다.

“그만, 그만, 나는 당신들의 수다스러움에 끝장을 내야겠다. 당신들은 이제 의원이 아니다. 다시 한 번 말하겠다. 의회는 막장이다. 당신들 중에는 유곽의 포주도 있고 술주정뱅이도 있다. 부정하거나 아니면 부패한 사람들이다. .....당신들은 의원으로서 참석할 자격이 없다.”

그리고 하원 권력의 신성한 상징인 의사봉을 들고 “이 지저분한 물건을 어떻게 한다?”고 하면서 직원을 불러 갖다버리라고 고함쳤다. 의원을 전부 추출하고 나서 출입문을 잠갔다. 군인 하나가 열쇠와 의사봉을 들고 나갔고 장기의회는 그 누가 말했듯이 꿈처럼 소리 없이 조용하게 사라졌다.

크롬웰은 1658년에 59세라는 나이에 우울증과 열병으로 타계하자 전통적인 영국을 개조하려고 성급하게 구축한 모든 제도는 기초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후계자로서 그의 아들 ‘리처드’를 지명했다. 그 후 무정부상태가 약 18개월 계속되었고 그동안 의회의 군부는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크롬웰이 타계한 지 불과 2년도 못되어 그의 모든 사업은 그 자신처럼 잔해만이 남게 되었다.(출처 : 앙드레 모루아. 영국사. 김영사.)

기독교인들은 청교도의 업적, 신앙 등에 자긍심을 갖기도 한다. 그래서 일까 현대에 이르기까지 청교도에 대한 매우 긍정적 이미지를 그린다.

그러나 작금의 대한민국의 기독교는 청교도의 어떤 점을 계승 발전 해 나가야 하며, 어떤 점을 배격해야 하는 것일까에 대한 고민은 그리 많지 않다고 생각 한다. 아니 도리어 긍정적인 면을 앞세울 뿐, 배격해야할 문제에 대하여서는 무관심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라 한다. 곧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생명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생명이라도 귀히 여기고 구원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역사 속에 기독교는 어떻게 생명을 존중해 왔을까?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선포 할 때부터 기독교는 생명존중보다는 국가주의에 충성하는 어용종교화 되었던 것은 아닐까? 또한 청교도 독제자 크롬웰의 길을 답습해 온 것은 아닐까? 예수님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4:17) 하고 외치실 때의 유대종교의 기득권 세력의 길을 걸어오지는 않았을까? 등을 돌이켜보고, 생명을 존중하는 복을 누리도록 하자.

실족(失足)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因)하여 세상(世上)에 화(禍)가 있도다. 실족(失足)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失足)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禍)가 있도다(마태복음 18;7)

한국장로교신학 학장•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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