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승 자 목사

“내가 네게 진술한 모든 복과 저주가 네게 임하므로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로부터 쫓겨간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 일이 마음에서 기억이 나거든/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것을 온전히 따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시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흩으신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리니/네 쫓겨간 자들이 하늘 가에 있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모으실 것이며 거기서부터 너를 이끄실 것이라”(신명기 30장1-4절)

그리스도인은 신앙적으로나, 인간관계서나 신실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은 우리의 삶의 현장서, 이웃과 지역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살아야 한다. 그런데 인간은 멀리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사랑하면서, 가까운 이웃에 대해서는 인사도 하지 않고 각박하게 살아간다. 세계는 사랑하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에 대해서는 사랑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늘 대한민국의 현실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 냉정한 것이 오늘 우리사회의 현실이다. 이웃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공자는 중용적이며, 열정적이고, 사려 깊은 사람을 제자로 삼았다. 지역사회에서 존경받는 사람은 경멸했다. 지역사회에서 존경받는 사람은 물에 물탄 듯, 이웃주민들에게 잘 보이려고만 했기 때문에 제자로 삼지 않았다. 열정적이면서 사려 깊은 사람을 제자로 삼았다. 열정적인 사람은 끈기를 가지고 자신이 목표한 일을 열정으로 해 낸다.

우리가 아이를 기름에 있어 의무적으로 공부를 잘 하라고만 몰아붙이면, 아이는 비뚤어지게 되어 있다. 그래서 아이들이 재미있게 공부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이런 아이는 열정적으로 공부한다. 대한민국의 아이는 부모의 성화에 못 이겨 억지로 공부하고, 서양의 아이들은 열정을 가지고 재미로 공부한다. 서양의 부모는 아이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밀어준다.

이같은 아이의 능력은 대학생활과 사회생활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예수님을 따른 사람들도 열정적이었다. 베드로가 그랬고, 세리가 그랬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열정적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했다. 그렇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열정적으로 믿음의 생활을 해야 한다. 지금보다 낳은 세상을 갈망해야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치있게 생각하는 사람을 제자로 삼았다.

그리스도인들은 함께 있는 못하는 교인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고난당하는 이웃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내가 신실한 예수님의 제자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중략)…/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골로새서 1장3-9절)

햇빛중앙교회•본지 후원이사장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