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 태 영 목사

사도 바울이 인간의 죄에 대해서 사용한 말이 있다. “죄가 나를 기만했다”는 것이다(롬 7:11). 죄는 항상 나를 기만한다. 가나안 정착 당시 미디안의 바알 브올이 이스라엘 병사들을 파멸시킨 고사가 있다. 이스라엘 남자들을 바알 축제에 초대해서 미디안 여인들을 품도록 유혹한 것인데(민 31장). 군사적으로 막기 어려운 상대를 미인계를 쓴 것이다. 문제는 다음이다. 바알의 농탕한 축제에 참가한 이스라엘 남자들에게 끔찍한 괴질이 돌아 수많은 사람들이 죽게 된다. 이때 염병으로 죽은 자가 이만사천이나 된다(민 25:9). 광야 생활에 지친 이스라엘 남자들에게 바알 브올의 초대는 마치 오아시스와도 같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달콤한 초대는 끔찍한 결과를 가져왔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였도다”(롬 7:11). 원래 율법은 선한 목적으로 제정된 것이었음에도, 죄가 율법을 죄의 도구로 만들어버렸다는 바울의 통탄이다. 만일 죄가 추한 모습으로 유혹한다면, 사람들은 쉽게 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죄는 선을 도구로 삼아 악을 행하고, 정결을 도구로 삼아 불결을 행하고, 아름다움을 도구로 삼아 추악한 일을 한다. 바울의 정언대로 죄는 항상 나를 기만한다. 몰라서가 아니라 내 안의 욕망, 탐욕, 자만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고 가슴을 처도 애곡하지 않는 세상 풍조를 탄식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유대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특권에 눈이 어두워 죄 없는 예수를 박해하고 죽이기까지 했다. 그것도 신성한 예루살렘성전을 모독하고 율법을 폄훼했다는 이유로.

오늘날 세속 사회는 가짜 뉴스를 유포시키는 것처럼, 죄라는 의식도 없이 죄를 유포시킨다. 마치 교양인의 모습으로, 세련된 라이프스타일인 것처럼, 언론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죄로 물들인다. 저 옛날 바알 브올의 달콤한 유혹 보다 더 달콤한 방식으로 우리를 죄로 물들인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 끈질긴 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가? 역시 바울의 말을 빌리면, 죄를 인정하는 것이 첫째이다. 이 오염된 시대를 사는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죄를 짊어지고 살수밖에 없다. 내 힘만으로는 이런 죄의 갑옷을 벗을 수 없다. 죄를 벗는 길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에 나를 온전히 드리는 길 밖에 없다.

삼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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