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헌철 목사
심한 발작 증세에 있던 ‘세베루스’(Severus)는 한 그리스도인의 도움으로 회복되어 대체적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우세한 힘을 가지고 있는 무지한 군중들과 진부한 법조문은 여전히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데 힘을 발휘 하였던바 이를 다섯 번째 박해(A.D192)라 한다. 당시 기독교의 확산은 이교도들을 놀라게 했으며, 우연히 발생된 재앙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돌리는 케케묵은 중상이 A.D.192년에 다시 시작되었다.

그러나 박해가 맹위를 떨칠수록 복음은 더욱 찬란한 빛을 발하였다. 또 사나운 적들의 계속되는 공격에도 복음은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견고하기만 하였다. 이 시대에 살았던 ‘터툴리안’(Tertullian)은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로마 군주들에게 항복했더라면 로마 황제는 결코 유명해지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로마의 목자였던 ‘빅토’(Victor)는 A.D. 201년 즉, 3세기가 시작되는 첫해에 순교 당하였다.

‘세레누스’와 ‘헤론’(Heron), 그리고 ‘헤라클리데스’(Heraclides) 등도 참수 당하였다. ‘라이스’(Rhais)는 그녀의 어머니 마르셀라(Marcella)와 마찬가지로 끓는 물을 온 몸에 뒤집어 쓴 후 불에 태워졌고, 라이스의 자매인 ‘포타이니에나’(Potainiena)도 ‘라이스’와 같은 방법으로 처형되었다.

이 때 군대의 소속장교였으며 그녀의 형 집행에 참석했던 ‘바실리데스’(Pasilides)는 후에 개심하였으며, 장교였던 ‘바실리데스’도 로마인의 우상에게 선서를 강요당했다. 그때 그는 자신은 그리스도인이므로 우상에게 맹세할 수 없다고 말하며 거절했다. 당혹한 사람들은 처음에 자신들의 귀를 의심하였다. 그러나 그는 다시 이를 분명히 밝혔다. 그는 재판관 앞에 불려갔으며 투옥되었다가 지체함 없이 참수를 당하였다..(출처 : 팍스의 기독교 순교사)

또한 리용의 감독이었던 ‘이레니우스’[Irenaeus 이레네우스)]는 4 복음서 모두를 영감 된 정경임을 강력하게 지지했다: “복음서들이 네 개 이상도 이하도 될 수 없다.”(<이단 논박> III.11.8) 그는 <이단 논박>에서만 빌레몬서, 베드로후서, 요한삼서, 유다서 외의 모든 신약 성경으로부터 무려 1,075개의 성경 구절을 인용했다. 이런 점에서 ‘이레니우스’가 오늘날의 신약 성경 27권 모두를 영감 된 한 권의 성경으로 간주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고 하며,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으나 라틴어 성경 불가타(Vulgata)를 번역한 제롬(Jerome), 즉 히에로니무스(Hieronimus)는 약 200-202년경 그가 순교했다고 전한다.

작금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단 등에 대하여 여유가 있어 보인다. 물론 그들도 전도 곧 구원의 대상임을 부정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단들에 대하여 지나치다 할 정도로 관용을 베풀며, 더 나아가 이단성의 남용 운운하며, 도리어 제도권의 양식 있는 학자들까지 매도하는 등에 대하여는 고개가 갸우뚱 해진다. 진정 그들을 사랑해서인지? 아니면 몇몇 잘 못 된 인식으로 그들의 자금을 지원 받는 등으로 그들을 변호하는 데 앞장서는 것인지 분별하는데도 혼란스러움을 갖게 한다.

그러다 보니 이 방인들이나, 이단자들이 “안티”가 되어 괴악할 정도로 하나님을 모독하고 그리스도인들을 조롱하며 이에 군중들까지 편승하게 됨으로 무서울 정도로 세력을 이루어 그리스도인들을 몰아가지만, 전도 집회 등은 끊임없이 그 열매를 맺어 간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그 열매도 정치, 경제, 사업 등 자신들의 성공과 출세에 그 무게를 두고 교회를 정한다는 점에 아쉬움을 지울 수가 없다. 그럼으로 그러한 열매 등, 우리의 모습에서 과연 순교가 입에 오르내려 질 수 있을 것인가? 따라서 이에 로마의 장교였던 ‘바실리데스’(Pasilides) 등의 순교에 고개가 숙여지는 이유이다.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를 삼으니 저희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저희 멸망은 자지 아니하느니라(벧후2:3)

한국장로교신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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