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태영 목사
아브라함이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은 데 대해 바울의 생각과 유대인들의 생각이 갈린다. 바울은 인간의 자기 부정을 통한 하나님의 은총에 의존했고, 유대인들은 자기 긍정에 의존했다. 어찌 생각하면 바울의 생각보다 유대인들의 생각이 더 합리적이다. 하나님께서 능력을 베풀지라도 인간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기에 하는 말이다.

하지만 바울이 믿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불러내시는’ 분이다. 아브라함이 처음부터 이런 믿음을 지녔던 게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노쇠한 자신에게 자손의 번성을 축복했을 때, 아브라함은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창 17:17) 라고 냉소하기까지 했다. 이는 자연인 아브라함이 피할 수 없는 시험이다. 그의 육체는 이미 죽은 자나 마찬가지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불가능을 선언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믿음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 자기 부정의 시험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믿음은 불가능의 가능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둘러싼 세계는 하나님의 ‘약속’과는 상반되어 있다. 하나님은 영생을 말하지만, 세상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으로 뒤덮여 있다. 우리의 이성으로는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게 모두 망상에 가깝다. 오직 믿음만이 불가능을 가능케 한다. 칼 바르트는 ‘아브라함은 마침내 믿음을 통해서 인간의 이성과 경험과 상식을 포박시켰다’고 했다. 포박시키다니! 인간의 이성과 경험과 상식이 그만큼 강력하게 믿음을 훼방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간다.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한 ‘기록’은 지나간 사람에 대한 ‘기록’이 아닌(롬 4:23-25). 시공을 초월하여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아브라함의 믿음은 아브라함에게만 귀속되지 않는다. 그의 ‘믿음’은 그의 ‘기록’을 읽고, 듣고, 보는 모든 이들에게 동일한 믿음으로 효력을 지닌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스쳐 지나가는 귀로 듣지 말고 열린 귀로 들을 일이다.

삼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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