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가 보면

살다가 보면
넘어지지 않을 곳에서
넘어질 때가 있다

사랑을 말하지 않을 곳에서
사랑을 말할 때가 있다

눈물을 보이지 않을 곳에서
눈물을 보일 때가 있다

 

살다가 보면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기 위해서
떠나보낼 때가 있다

떠나보내지 않을 것을
떠나보내고
어둠 속에 갇혀
짐승스런 시간을
살 때가 있다

살다가 보면 

▲ 문 현 미 시인
“동토에 떨어지는 한 톨 풀씨로 첫 울음을 터 뜨리며” 세상에 태어났다는 시인. 그는 누구보다도 모국어에 대한 사랑이 큰 작가이다. 그에게 세상에 태어난 가장 큰 축복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인류가 가진 말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우주 만물을 다 담아낼 수 있는 어머니 나라의 말씀”이라고 대답한다. 부친께서 독립운동가이셨기 때문에 할아버지 슬하에서 소년기를 보냈다. 광복, 분단,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홀어머니의 외동아들로 자란 시인은 겨우 글자를 익히고 글을 써 보려고 붓을 들면 울컥 솟구치는 것들이 가슴을 파고든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이것은 시인의 가족사적인 아픔인 동시에 우리 모두가 겪은 시대의 아픔이기도 하다.

이 시는 한 번 주욱 읽고 나면 걸림이 없이 편안하게 시의 메시지가 들어온다. 누구나 살면서 느끼고 깨닫게 되는 것들을 시의 형식을 빌어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적 화자가 고백의 어조로 담담하게 독백하는 것을 가까이에서 듣고 있는 느낌이 든다. 시의 어디에도 어려운 수사적 비유가 보이지 않는다.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것이다. 물이 아래로 흘러가듯, 누에고치에서 비단실이 줄줄 뽑혀 나오듯 그렇게 표현되어 있다. 어색하거나 부자연스러운 구석이 도무지 눈에 띄지 않는다. 시인의 탁월한 언어 연금술로 인해 공감의 효과가 극대화 된다. 시인이 살면서 겪은 체험이 나의 체험이 되고 너의 체험이 되고 우리 모두의 체험이 된다. 넘어지지 않을 곳에서 넘어지고, 사랑을 말하지 않을 곳에서 사랑을 말하게 되며, 눈물을 보이지 않을 곳에서 눈물을 보이는 때가 누구에게나 있다.

시인 개인의 특별한 체험이 독자의 보편적 체험으로 전환하게 되는 경이가 이 시의 매력이다. 한 연씩 읽을 때마다 독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반응하면서 시 읽는 기쁨을 만끽하게 된다. 시인은 시의 제목 ‘살다가 보면’을 마지막 연으로 배치시킴으로써 시적 구성의 묘미를 잘 살리고 있다. ‘어둠 속에 갇혀/짐승스런 시간’을 살아낸 시인. 고산준령을 넘으며 숱한 비바람을 맞았을텐데 그런 아픔과 슬픔이 시인 내면의 용광로 속에서 명품 도자기로 구워진 것이다.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녹아든 좋은 시 한 편! 그로 인해 땅에 머문 마음이 높푸른 하늘가로 하염없이 날아 오른다.

백석대 교수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