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성경을 각색하는 역사적 비평주의

▲ 김재성 목사
성경비평학이라는 학문은 1697년 창세기의 모세 저작설을 부인하면서 B.C. 800년경의 문서라고 주장하다가 영국 에딘버러 대학교에서 퇴학을 당한 아이켄헤드(Thomas Aikenhead)가 효시라고 간주되고 있다. 18세기 계몽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인본주의 철학이 확장되면서 이성적 합리주의가 각종 종교적인 이론들을 만들어냈다. 20세기에 틸리히 (Paul Tillich)에 이르게 되면, 훨씬 더 과격한 가설들이 등장해서 정통신앙에 도전했다. 성경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반동적 문자주의 (reactive literalism)를 신봉하는 자들이라고 매도하면서 집단적 이기주의로 지배해 왔다고 비난했다. 의식적 문자주의자들 (conscious literalism)의 억압이 지속되어 왔다는 것이다.

성경에 대한 문서비평학자들의 가설적인 견해에 따르면 신약성경의 원본에서는 마가복음이 가장 먼저 주후 70년 경에 쓰여졌다고 추정한다. 마태와 누가 등이 각각 90%정도 활용하여 쓰여졌다느니, 요한은 마가복음을 약 50%정도 활용하고 다른 것을 수집했다하더니, 그밖에도 “Quelle”문서 (자료)라고 불리우는 것들이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 시대에 목격자들의 증언들을 임의로 수집했을 것이라고 한다. 큐 문서라는 것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르면서, 비평학자들은 무한대의 신뢰를 하고 있다. 어느 정도 간접자료의 모음집이 있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역사 비평학자들은 성경은 역사적 증거라기보다는 고백적인 언어라고 보아야 한다는 식으로 격하시키면서, 그저 종교적인 자극을 주려는 의도에서 기록된 것이라고 본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내용들이 흥부와 놀부 이야기와 같은 것인가?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교훈을 주는 정도로 읽어야할 책인가? 구약성경도 여러 문서들이 혼합되어 편집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과연 어느 것이 제사장 문서인지, 야웨문서인지, 엘로힘 문서인지는 누구 알 수 있을까? 하바드 신학대학원에서 종교 다원주의자로 영향력을 행사한 스웨덴 출신의 루터파 신학자 스텐달 (Krister Stendahl, 1921-2008)은 성경은 지적인 정보나 내용(information)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변화(transformation)를 주기 위한 것이다고 주장한다.

게이와 레스비언의 옹호자였던 신약 교수가 성경의 내용이 역사적으로 정확하느냐의 여부는 묻지 말라고 하였다. 신약성경의 필사본 중에서 현재까지 발견된 것 중에서 최고 오래된 사본은 주후 175년경의 필사본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어찌하여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받는데 문제가 된다는 것인가? 예루살렘에서 퍼져나간 기독교는 복음을 가슴에 담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지켰던 것이다. 구약시대에는 일반 대중들은 훨씬 더 무지한 가운데서 있었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는 공손히 배우고 따라갔었다.

하지만, 비교종교학자들은 갖가지 가설들을 내놓고 정통 교회의 신앙적인 선언들에 대해서 도전하고 있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이성적 검증을 최종무기를 내세운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혼란을 부추기는 것이다. 이들은 ‘내가 한때 가졌던 신앙내용을 진리자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라고 말하게 한다. 어린 시절에 교회에서 받았던 모든 교육과 가르침을 벗어나는 것만이 지성적인 기독교인으로 진일보하는 것이라 말한다.

노아 홍수가 지구 전체적으로 일어난 사건이라는 성경의 기록에 대해서 의문을 품는다. 지구 전체가 모두 다 물로 잠겼던 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말한다. 몇 가지 근거들을 거론하면서, 비과학적인 진술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노아 홍수 사건이 우주적이었다는데 대해서 결정적인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고 있다.

또 어떤 학자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유대인이라는 한 부족의 신론이라고 축소시킨다. 자기 민족의 번영을 위해서 지어낸 신에 대한 사상이라는 것이다. 다른 민족을 정벌하고 생존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신론이라고 평가절하 하고 있다. 출애굽 사건은 자기 백성밖에 모르는 하나님으로 그려졌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 하나님이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냐고 반문한다. 가나안 정복의 사건들, 특히 여호수아의 지도아래 정복자들이 승리하게 하는 기록에는 잔인하신 하나님만이 부각되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고대 시대에 편협한 신관이고, 유대인들의 민족적인 신앙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구약시대에 정착된 제사 제도에서 보면, 장애인은 제사장으로 발탁되지도 못했고 성전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현대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구약성경의 제사장 제도들은 결국 사람을 차별하는 하나님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편협한 하나님의 개념은 버려야만 한다고 말한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유대인들이 고수해 왔던 철저한 율법주의라는 종교적인 규범과 특징들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결국, 오랜 기간 동안 민족 율법주의적인 믿음과 삶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순종으로 사람을 옭아매서 사람의 자유함을 없애버리는 것이라고 비난한다.

종교다원주의로 전개되고 있는 다양한 변화는 유대인들이 가졌던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조건부 신론이라는 비판에 기인하고 있다. 율법을 잘 지키면 복을 받는다는 유대종교라는 것은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신앙인을 양산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보통 사람들은 항상 내 뜻대로 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데 유대인 중심 인종적 배타주의에서 다원주의로 바꿔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기독교만 유일한 진리종교요, 예수님만 인류의 유일한 구원자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모든 종교들을 진리와 구원의 길에 함께 가는 동반자로 생각하고 협력해야 한다면 이는 심각한 정통신앙의 왜곡이다. 일찍이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 칼 라너 (Karl Lahner), 죤 힉 (John Hick), 콥 (John Cobb) 등이 다원주의가 확산되는데 견인차 역할을 한 종교 포용적 다원주의자들이자 보편구원론의 주창자들이다. 뉴욕 유니온 신학대학원의 한 교수는 “불교의 부처 없이는 기독교인이 될 수 없다”는 극단적인 책도 출판했는데, 자신이 믿고 있는 로마 가톨릭과 불교의 상호일치점이 많다고 주장한다.

한국에서 종교다원주의자들로는 유영모, 함석헌, 변선환, 길희성 등을 꼽을 수 있는데, 한결같이 동양사상과 기독교와의 혼합을 시도하였다. 현각 (폴 뮨젠)이라는 이름을 화계사 숭산의 제자로 받았다는 한 하바드 신학대학원 졸업생에게서 우리는 확산되어나가는 전환시대의 종교다원주의를 목격하게 된다.

정통 개신교 교회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는 교리를 주장하는 것은 기독교의 분열을 꾀하는 것이며, 타 종교와의 평화를 해치는 것인가? 정작 그렇게 믿어온 교회의 신앙고백을 변경시키면서 분열하는 사람들은 과연 어떤 연합을 하고 있는가. 그들을 지지하는 자들끼리 모여서 서로 연합한다고 자화자찬하는 자들이 아닌가. 현대 교회의 분열은 누가 획책하는 것인가? 정통신앙을 버리고 새로운 신학이론으로만 매달리는 자들에게 물어야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하면서, 그동안 교회가 가르쳐온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동정녀 탄생, 십자가와 부활, 승천과 재림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아야 한다면, 과연 예수님의 사랑, 은혜, 평화라는 것의 실체는 무엇일까? 우리는 예수님의 사역과 말씀을 둘 다 동시에 믿고 받아야만 한다.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치심을 동시에 믿어야만 한다. 그분이 가지고 살았던 것과 주셨던 말씀을 우리가 동시에 가지고 살아가야만 한다.

<다음호에 계속>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