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효 종 목사

아름다운 감사의 계절, 결실의 계절이다. 들판이나 산에나 넉넉하고 충만한 기운이 온 천하에 가득하다. 구슬땀을 흘려 가꿔온 결실을 수확하는 기쁨을 맛보고, 결실을 나누는 기쁨도 맛보는 아름다운 시절이다. 온 세상이 형형색색으로 물들어 가슴마저 따뜻하게 만든다.

교회적으로도 4대 절기 중 하나인 추수감사절이 있는 중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각 교회들은 저마다 다양한 형태로 하나님이 주신 풍성한 수확의 결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담아 추수감사절을 준비하고 있다.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은혜롭고 경건하게 준비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다만 올해 추수감사절은 교회 울타리를 벗어나 지역의 소외된 이웃들과 함께 하는 추수감사절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솔직히 오래전 모두가 어렵고 가난한 시절에는 추수감사절이 말 그대로 마을 전체의 축제나 다름없었다. 지역 주민들을 초청해 먹을 것을 나누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으로 의미를 살렸다. 딱히 교회에 나오라고 강압적으로 하지 않아도, 이날만 되면 지역 주민들은 스스로 교회의 문턱을 넘었다. 직접적인 전도가 아닌 간접적인 전도인 셈이다. 그 과정에서 교회는 나눔과 섬김의 공동체로서 본이 되었고, 하나님 말씀은 강력하게 임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고, 살기 좋아지면서 이러한 아름다운 문화는 사라진듯하다. 물론 여전히 농촌이나 산촌, 어촌 등 일부 지역에서는 여전히 마을 축제로 치러지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교회만의 축제로 끝이 난다. 워낙 교회의 문턱이 높아(?) 소외된 지역 주민들은 교회의 문을 두드릴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그러는 사이에 지역주민들의 든든한 버팀목이자 친구였던 교회의 이미지는 온데간데없고, 부자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교회의 모습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더 이상 작은 것 하나라도 나누었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심지어 일부는 4대 절기에 걸맞게 교회의 모자란 재정을 충당하기 위한 하나의 절기로 치부해 버리는 경우도 있다. 무리한 교회 건축에 따른 부족한 재정분을 이 기회에 채워 넣는다. 성도들에게 추수감사절에 대한 올바른 의미를 부여해주지 않고, 그저 감사 헌금을 많이 낼수록 하나님의 복을 더 많이 받는다는 식으로 강요 아닌 강요를 한다. 결국 성도들은 감사 헌금 최대치를 뽑아내기에 이른다. 장로나 권사 등 직분자들은 일반 성도들보다 더 큰 액수를 내기도 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추수감사절은 단순히 헌금을 많이 내는 절기로만 국한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수확물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담아 드리는 헌금의 의미는 살리되, 반드시 나눔과 섬김이 뒷받침될 때 비로소 추수감사절의 의미는 빛을 발한다.

따라서 올 해 추수감사절만큼은 올곧이 하나님께 드리고, 동시에 지역의 소외된 이웃들과 나누는 기쁨이 있는 추수감사절이 되길 기대해 본다. 그저 1년에 한 번 있는 절기행사로만 국한시키지 말고, 이 땅에 진정 가난과 굶주림으로 고통 받는 소외된 이웃들을 위해 아낌없이 나누는 절기가 되어야 한다. 한국교회가 권좌에 앉아 재물을 가득 움켜쥐고 있으며, 흔히들 말하는 한국교회의 생태계는 50년이 아닌 30년, 혹은 10년 후 멈춰버릴지 모른다. 이대로 가다가는 한 때 흥망성쇠를 이뤘던 중세 유럽교회들처럼 소리 없이 사라져 버린다. 휘황찬란한 예배당은 술집이나, 온갖 유흥업소들의 무대로 변해버리고, 어둠을 밝히는 십자가탑의 위용은 사라지고 대신에 화려한 내온사인만이 어둠을 밝힐 것이다.

이제 한국교회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대한 감사한 마음과 더불어 이 땅의 가장 낮은 자의 심경으로 소외되고 버림받은 이웃들을 위해 섬김의 본을 보여야 하다. 성장주의, 맘몬주의의 노예가 되지 말고, 예수가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었듯이, 소외된 이웃들의 가렵고 아픈 부분을 닦아주는 참된 교회의 모습을 이번 추수감사절에는 되찾길 간절히 소망해 본다.

한교연 상임회장•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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