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 헌 철 목사

인디언들에게도 “어르신들이 가르쳐 주는 것”이 있다.

“사람들은 내게 물어, 내가 어떻게 그 맣은 것을 아는가 하고, 그러면 그들에게 말하지. 어르신들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을 뿐 이라고, 아이였을 때 나는 틈만 나면 할아버지와 할머니들 옆에 앉아서 그분들이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곤 했어, 그러면 그분들은 여러 세대를 통해 전해온 놀라운 이야기들을 쏟아내셨지. 노인들은 거짓말하는 법을 업ㅂㅅ거든, 아마도 외부 사람들에겐 그 이야기들이 황당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이야기들은 모두 사실이야, 어르신들로부터 나는 하늘과 우주를 다스리는 신령전사들에 대해 배웠어, 그분들은 나에게 별들, 샛별과 저녁별 그리고 큰곰자리와 그 모든 별들의 이름을 가르쳐주셨지. 그분들은 그렇게 별들에게 생명을 실어 나르곤 하셨어. 이보다 더 큰 힘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는 어르신과 조상들의 가르침대로 살아, 어르신들은 젊은이와 아이들에게 영적인 가르침을 주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또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 말이야. 수천 년 동안 쌓이고 쌓인 지혜가 그분들의 입을 통해서 샘물처럼 흘러나와. 어르신들은 가족의 중심이야 그분들이 없으면 가족은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지. 가족이 없다면 우리들은 아무것도 아니야. 심을 정원도 없다면 씨는 그저 바람에 날아다니는 먼지에 불과해 가족은 정원이야 영혼의 정원 말이야. 우리 인디언 사회에서는 나이 들면 어르신이 돼, 그러나 백인 사회에서는 그저 늙은이가 될 뿐이지“(출처 : 지혜는 어떻게 오는가)

성경에서도 어르신들의 가르침에 대한 내용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디모데 후서 1장 5절)는 말씀 등이 있다.

이는 디모데가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의 신앙적 가르침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지금까지 기독교 가정에서는 얼마든지 보여 지는 현상이기도 하다. 그럼으로 무엇인가 는 꼭 달라야 한다고 하지 않아도, 기독교인이라면 그리스도 안에서 라면 그래도 달라야한다는 것이 사회적, 기독교적 요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거짓과 탐심으로 가득함을 보인다는 비판에 대하여, 어디에서부터 문제인가는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저 믿음이 있으니 구원 받았고, 주님을 위해 살기에 다르다고만 말할 것인가?

따라서 생각해 보자 돈과 남편? 돈과 부인? 등에서 교인들은 어느 쪽을 선택할까?

돈 때문에 남편을, 돈 때문에 아내와 이별하는 경우, 심지어는 부부간에 살해하는 일까지도 심심치 않게 발생한다. 문제는 기독교인들 간에도 그러한 일이 발생 된다는 점이다. 심지어는 부모 자식 간에도 불행한 사건들이 발생 되지만, 교회는 어떠한가? 이제는 일부라고 말 수 없이, 다수의 교회들에서 돈으로 인하여 분리되고, 소송전이 일어나고, 심지어는 성도가 자살하는 사건들이 발생되기도 하지 않는가? 신학적인 논증을 떠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돈으로 인하여 생명을 해하며, 권력의 욕망을 위하여서는 같은 성도간의 대화보다는 거짓을 진실인양 꾸며 살의를 품는 일이 심심치 않게 보여 지지 않는가?

따라서 인디언들의 전통적인 가르침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지 않음으로 지옥에 갈 가르침이라고만 하기에는 우리의 모습도 너무 비참하지 않은가? 돈 때문에 이단들에게 교회를 팔아먹고, 돈, 권력 때문에 성도들 상호간에도 매정하게 몰아치며 사지로 몰아가고, 돈, 권력 때문에 이단들과 같은 배를 타는 행위 등에서 우리역시 “어떻게 살 것인가? 또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해야 한다.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마 23:26)

한국장로교신학 학장•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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