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일웅 목사.

[문제제기]

지금 우리 대한민국은 매우 혼란스러운 나라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그렇게 느껴지지 않으세요? 매 주말만 되면, 광화문 사거리에는 “대통령하야”를 외치는 소리가 하늘을 찌르고 있으며, 서초동 검찰청 앞과 여의도 국회 앞에서는 친정부를 위한 데모로 야단들입니다. 왜 우리 대한민국이 이렇게 되었을까요? 우리 대통령은 이러한 혼란스러운 모습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아요! 너희들 떠들어라, 권력은 내가 쥐고 있으니,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오기로 청와대 안에서 버티고 계신 것 같습니다. 대통령 은 그의 취임사에서 참으로 감동을 주는 멋진 말 하지 않았던가요? 나를 반대하는 사람들과도 광화문에 나가서 기꺼이 만나 함께 대화하겠다! 역시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달라야 하는가봅니다.

존경하는 목회자 여러분, 중요한 것은 지금 이념대립이 극렬해지고 있는 혼란스러운 현 시국상황을 경험하면서,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던져진 화두는 “목회자의 나라사랑”에 관한 주제입니다. 우리는 목회자로서 나라사랑의 방법을 고민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 “목회자의 나라사랑”은 과연 청와대 앞에서 전광훈 목사처럼 행동해야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우리 대통령처럼 가만히 시간이 지나가도록 조용히 침묵하고 있는 것이 나라사랑일까요? 곤란한 질문입니까? 그러면 이렇게 질문해 보겠습니다. 전광훈 목사는 왜 청와대 앞과 광화문광장에서 벌써 약 6개월째 저렇게 “문대통령하야”를 외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부터 살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합법적으로 국민투표에 의하여 선출된 대통령을 그렇게 물러가라고 막무가내로 소리치는 것이 정당한 행동일까요? 아마도 전목사님은 3년 전 박근혜대통령의 탄핵 상황을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질문됩니다. 그는 비록 한국교회의 한 목회자요, 소위 “한기총대표”라는 직함을 가진 자로서 이와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 그것이 과연 목회자의 참된 나라사랑하는 모습인지? 먼저 질문됩니다.

잘 아시는 대로 처음 전광훈목사가 이러한 행동을 시작했을 때(6월), 소위 한국교회의 자칭 원로님들이 기자들 앞에서 전목사의 행동을 비판하는 기자회견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은 대통령하야를 외치려면, 목사직 내려놓고, 정치인의 이름으로 행동하라고 충고했습니다. 한기총은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기관이 아니라고, 그 대표직도 내려놓으라고 비판하였습니다. 저는 그 기자회견을 보면서, 질문이 생겼습니다. 전목사가 목사직을 내려놓고, 한 정치인으로 행동하라는 비판에는 동감하지만, 그러나 전목사가 지금 제기한 대통령의 정책실패와 국론을 분열시키는 언행과 관련된 7가지를 지적한 대통령을 향한 전목사의 비판은 정당해 보였으며, 그 문제의 당사자인 대통령을 향해서는 한마디도 충언하지 않는 원로님들의 행위가 참으로 아부하는 행위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기독언론지 3곳에 칼럼 하나를 발표했습니다. 제가 속한 합동교단 기독신문에도 보냈는데, 처음에 실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저의 글이 이단들을 회원으로 수용한 전광훈 목사를 두둔한 것 같아 오해가 되니, 그 부분을 좀 수정해 주면 실어주겠다는 전갈을 받고서 수정을 통해 기독신문에도 게재될 수 있었습니다.

생각하면 제가 쓴 칼럼의 기본내용은 우리사회의 이념대립의 불을 부친분이 대통령인데, 전목사만 목사직을 내려놓고, 정치인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원로들의 충고는 동의하지만, 전목사님이 제기한 문제들과 관련하여 대통령에 대하여 이념갈등을 부추기지 말라는 충언을 반드시 했어야 했으며, 적어도 한국교회 원로들이라면, 현 시국을 보면서 양쪽을 다 비판해 주어야 원로의 권위가 더 살아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전광훈 목사만을 비판하는 원로들의 일방적인 행동에 이의를 제기했던 것입니다. 그 일로 우리 합동교단의 한 제자목사로부터 이단 옹호자인 전광훈 목사를 총신대학교전총장이 두둔 했다고 비판하는 항의전화를 받기도 했습니다.

존경하는 목회자 여러분, 목회자가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은, 목사이전에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당연한 일인 줄 압니다. 아마도 전목사처럼 행동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국가가 위기에 처하여 있다면, 어떤 면으로라도 목회자는 당연히 나라사랑의 의지를 표명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로서의 나라사랑에 관한 표현과 행동은 과연 어떤 것이 좋은지? 이러한 질문에는 역시 신중성이 요망됨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1. “정교분리원칙”에 관한 올바른 이해요망

한국교회는 오래전부터 “정교분리”라는 원칙을 고수해 왔습니다. 그 때문에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국가의 통치자가 독재를 하거나 잘못해도, 교회는 오직 침묵하고, 조용히 기도나해 주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정교분리”라는 이 원칙이 왜 생겨난 것인지? 그 본래의 의도를 정확히 알고 보면, 한국교회가 그간 얼마나 오해하고 있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즉 그것은 교회가 국가(정치)에 대하여 간섭하지 않고 침묵해야 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국가(권력)가 교회를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어디까지나 국가는 교회를 보호해야 한다는 뜻에서 제시된 원칙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전광훈목사의 행동은 이러한 원칙을 바로 잡아, 행동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전목사는 그가 청와대 앞에 천막을 치고, 농성을 시작하면서 그의 행동에 대한 명분을 히틀러 독재정치에 맞서서 외쳤던 본회퍼의 말을 인용하면서, “미친 운전수에게 운전대를 맡겨서는 안 된다”는 유명한 말인데, 이 말을 내세우면서 전목사님은 그의 행동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대통령하야”를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전목사를 향하여 우리 모두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문제인대통령이 과연 독일의 독재자였던 히틀러와 동일시할 수 있는 일인가?” 전목사의 시각에서는 그렇게 비쳐졌는지 모르지만, 국민 다수의 시각에서는 전목사의 지나친 오해가 아닌가? 지금 반박되고 있기도 합니다.

원래 “정교분리”의 원칙은 미국 3대 대통령 제퍼슨이 미국 헌법에 제정한 것인데, 그의 의도는 하나님의 거룩한 영역으로 간주된 교회를 정부나, 정치권력이 간섭하여 좌지우지 못하도록 지상의 교회를 정부와 정치적인 권력의 간섭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유럽의 교회사는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지요,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래로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가종교로 등장하면서, 황제의 권력이 유럽의 교회를 1000년 이상 지배하고 다스리는 시대가 있었지요! 그러다가 종교개혁을 통하여 루터는 국가와 종교의 관계를 분리시켰습니다. 국가가 교회를 간섭하고 통치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영국은 사정이 달랐습니다. 국왕이었던 헨리 8세가 아들하나 얻고 싶어서 로마교황청에다 이혼허락을 여러 번 청구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자 마침내 수장령을 발표하여 교회위에 국왕이 있다는 소위 주장을 펴고, 프로테스탄트 편에 서면서 국가종교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것이“앵그리컨 처치”(Anglican Church)라 부르는 우리말 성공회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정교분리원칙이 우리 대한민국에서는 일제식민통치시대를 거치면서, 일제의 정치권력이 한국교회가 독립운동에 가담하는 일을 방지할 목적으로 정치가 교회에 간섭하지 않는 대신, 교회(종교)도 정치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으로 바뀌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한국교회 지도자들도 교회가 일제의 정치적인 탄압을 받아 교회와 지도자들이 옥고를 치르는 피해를 입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뜻에서 조선교회는 지혜로운 선교사들의 충고를 받아들여 정부(정치)를 간섭하지 않는 원칙을 강조하게 되었고, 그러한 생각 때문에 주기철목사는 일제의 신사참배강요에 항거하다가 순교했지만, 1939년 제28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정교분리의 원칙에 따라 신사참배를 결의하는 우를 저지르게 되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 이후 정교분리원칙은 이승만 대통령 덕분으로 대한민국 헌법 제20조에 명시되었는데, 제1항은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이며, 제2항은 “국교는 인정되지 않으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정교분리원칙의 본뜻은 국교를 막자는 것이며, 교회가 국가나, 정부(정치)의 권력남용을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정교분리원칙은 한국교회의 역사를 보면, 아이러니하게 그동안 진보교회와 보수교회의 이해가 달랐습니다. 한국의 진보교회 지도자들은 그동안 독재정치권력에 대항하여 민주화투쟁을 주저하지 않았으나, 보수교회지도자들은 일제식민통치시대의 경험을 근거로, 교회가 정치권력의 부패와 독재정치에 아무런 비판을 행하지 않았으며, 그러나 뒤로는 오히려 독재정권에 붙어 이득을 취하면서 지지까지 하는 상반된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정치하면 오히려 침묵으로 일관하는 관습에 빠져, 정교분리원칙만 강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지난 번 자칭 한국교회원로라는 분들 대부분은 아이러니하게도 전광훈목사의 행위는 비판하면서, 이전 정부시절 민주화운동과 박근혜 정부 비판에는 모두 앞장섰던 분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정교분리의 원칙은 교회가 정부를 간섭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와 정치권력이 교회를 보호하며,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것에 방점이 있으며, 권력을 남용하여 악을 저지르는 정치권력에 대해서 침묵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을 새롭게 일깨워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단순한 정교분리의 원칙이 아니라, 교회의 보호를 위하여 국가가 교회를 간섭하지 않도록 분리를 말하지만, “정교분리원칙은 정치와 종교는 구분되지만, 결코 서로 분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국민의 한사람으로서도 그러하지만, 역시 목사의 직분으로도 정치에 대하여 언제나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일정한 역할과 공동체(국민)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책임을 질 감당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더욱이 목사의 직분이란 세상의 모든 것을 알아야 하며, 정치적인 혼란으로 바른 구원의 길을 찾는 백성들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참된 진리, 구원으로 안내하는 영적인 지도자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선지자적인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국가와 종교는 각각의 역할을 가진 하나님이 세우신 기관으로 사회적인 역할 때문에 구분되지만 결코 분리되는 것이 아닌, 깊은 관계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목회자의 나라사랑에 최선을 다해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2. 세상나라의 정치와 권력은 언제나 하나님나라와 복음의 관점에서 주목하고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목회자들은 세상나라의 일들, 특히 정치와 권력사용과 관련하여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판단하며 행동해야 할 것인가? 이러한 질문의 대답은 역시 “하나님나라와 복음의 관점에서 세상나라를 직시해야 합니다. 이러한 시각을 보여주는 성경말씀은 바로 로마서13:1-7절 사이에서 발견합니다. 1절에서 바울은 “각 사람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고 일러줍니다. 그 이유는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으며,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고 말씀합니다. 즉 세상정부와 정치와 권력(칼)은 그들 독자적인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한 것이며, 하나님의 영역에 속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 때문에 오늘날 세상나라의 최고 권력자이며, 통치자인 대통령이 국민의 손에 의하여 뽑아 세워지는 민주적인 과정을 거치게 되지만, 역시 권력자는 하나님이 세우셨음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주권과 경륜과 섭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불신앙 자가 통치자가 된다 할지라도, 그를 통하여 그분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는 사실입니다.

일찍이 종교개혁자 루터도 두 왕국론(세상나라와 하나님나라)을 말하면서, 그 모두가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있음을 강조하였습니다. 특히 제네바의 종교개혁자 칼빈은 포악한 독재자(폭군)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를 세우셨다고 그의 국가관(기독교강요 4권)에서 밝히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13장 2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세상정부에 대항하면, 하나님의 권세에 대항하는 모습과 같음을 비유한 것이며, 결국 세상정부의 권세에 기본적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복종의 유비관계에 서 순종해야 할 것을 말해 줍니다.

다시 정리하면, 사도바울은 세상정부의 정치권력은 하나님이 허락한 것이며, 그것은 근본적으로 천지만물의 주권자이며 통치자이신 하나님이 하신 것이며, 또한 하나님은 이와 같이 세상정부를 통하여 인간사회의 질서가 지탱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1-2), 그리고 국가의 사법적인 권력(칼)을 통하여 선이 포상을 받으며, 악이 징벌을 받게 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3-4). 그것은 현대적으로 말하면, 입법권과 경찰권과 사법권의 행사에 해당하는 것이며, 사회적으로 선과 악의 분별을 통한 통치권의 상징적인 표현으로 하나님의 통치의 모습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5절에서 권세자들에 대한 복종은 우리 기독인들이 양심으로 행할 것과, 6절에서 각종세금납부에 관한 것을 말하고 있으며, 7절에서는 국가의 다양한 대표자들에 대해, 기독인들은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는 질서의 중요성을 일러줍니다(벧전2:17). 그러나 바울은 이 본문에서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국가의 통치 권력이 악을 저지르며, 총체적인 불의를 행하는 국가로 전락될 경우에 그 통치자에 대하여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자세히 말해주지는 않고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깊은 신학적인 행동철학의 통찰이 요구된다고 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이 교훈하시는 비유의 말씀을 통하여 더 깊은 이해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예수님은 천국(하나님의 나라)복음을 전파하시면서, 병행했던 일이 바로 병자치유와 특히 귀신들린 자를 치유하는 사역이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지상사역의 전체를 종합하면, 귀신(악령)을 내쫓는 모습으로 요약됩니다(막9:14-29,마8:28-34,마12:22-30). 여기에 귀신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부정한 악한 영(사탄)들을 뜻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러한 귀신축출사역은 역시 복음전파의 맥락과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준 사건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즉 귀신축출은 복음이 전파되는 곳곳에서 하나님의 영, 즉 예수의 영이 임하는 자리를 내어 주고, 악한 영들이 쫓겨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며, 그것은 또한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영역이 확장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결국 기독교(교회)의 복음전파는 이 땅에 그리스도의 통치영역의 확장이며, 동시에 세상의 악한 영들과 대립하여 싸워야 하는 영적전쟁을 뜻합니다. 악한 영을 쫓아내고, 그리스도의 영이 다스리는 환경으로 바꾸는 일이 기독교복음전파의 사명입니다. 그 때문에 사도바울은 벌써 성도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전심갑주를 입으라고 권고하였으며, 우리의 씨름(싸움)은 혈과 육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한 것”(엡6:10-13)임을 일러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지상의 교회는 예수의 영(성령)에 붙들린 택함 받은 성도들을 모으는 곳일 뿐 아니라, 이 땅에 정의롭고, 공정하며, 평화로운 그리스도의 나라가 임하도록 복음의 영향력을 사회적으로 미칠 하나님의 일꾼을 양육하며, 훈련하는 영적전쟁준비의 장소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세상정치를 예의주시하며, 특히 그곳에서 악한 영들이 좌지우지하는 환경이 되지 않도록 항상 기도해야 하며, 하나님나라가 확장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복음의 사회적인 책임(빛과 소금의 역할) 때문에 유럽에서는 세속정부에 기독교정당이 생겨나기도 합니다(유럽에서 독일은 대표적인 나라입니다).

생각하면 세상의 통치자, 또는 권력자가 기독인이라면 자기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하나님 앞에서 더 분명하게 인식하고 사명을 책임 있게 수행할 것입니다(미국의 트럼프대통령처럼). 그러나 비기독인의 통치자라 할지라도, 근본적으로 오늘날 민주화가 이루어진 국가에서는 국민을 위하고, 인권존중과 사회적 약자보호와 사회복지실현을 통한 경제평등과 평화지향의 환경조성에 정치적인 책임을 다하게 되어 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불신자 통치자를 통하여서도 하나님나라와 복음의 가치실현이 땅에서 부분적으로 이루어짐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회자의 나라사랑은 그런 점에서도 선한 정치가 펼쳐지기를 위하여 대통령과 위정자들을 위해서 주일 공 예배에서 기도하는 일을 쉬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각 지역의 교회들은 국회의원과 각 지역의 시장, 구청장, 경찰과 각 주민 센터의 장과 직원, 통반장들을 위해서도 하나님께 기도해주는 나라사랑이 동반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목회자의 나라사랑의 중요한 방법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국가의 통치자들의 모습이 그 반대일 경우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인 설교를 통하여 불의한 일과 부당한 정치행위에 대하여 선지자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면 우리는 청와대 앞과 광화문에서 대통령하야운동을 벌써 6개월째 지속하고 있는 전광훈목사의 나라사랑 행위를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여전히 질문입니다. 물론 그분의 행동에 대한 한국교회의 찬반견해가 있는 줄 압니다. 지난 8월경 한 통계는 전광훈목사의 행동에 대한 여론이 반대가 86%, 지지가 14%로 보도된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11월의 여론은 오히려 정 반대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지지자의 상승으로).

다만 본 강연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전광훈목사가 내건 시국선언과 투쟁에는 중요한 명분이 포함되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대한민국의 역사적 정통성이 부정되고, “자유민주주의”적인 정치체제가 무너지게 되는 국가적인 위기에 관한 그의 통찰입니다. 아마도 전목사는 이러한 중요한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관한 가치가 대통령과 집권여당에게서 잘 계승되기보다는 허물어지는 위기감을 느낀 것 같습니다. 특히 대통령의 그간의 친북성향의 언행에서 의심과 불신을 가진 것이 분명합니다(전목사가 제기한 7가지 대통령정책비판참고). 물론 전광훈목사의 지나친 기우이거나 오해일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문대통령이 북한의 비핵화를 위한 북미회담의 중재자역할에서 보여준 그간의 지나친 친북적인 언행들이 단초가 되었으며(평창동계올림픽 연설에서 신영복을, 6.6현충일 연설에서 김운봉을 거론한 일), 더욱이 현 정권의 배후세력으로 회자된 소위 정치권에 등장한 주사파인물들의 활약과 관련하여 결코 단순한 루머로만 넘길 수 없는 근거들이 드러난 것으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목회자들의 나라사랑은 현 정치시국을 예의주지하지 않을 수 없다고 봅니다. 특별히 문대통령의 정치사상이 자유대한민국의 역사적인 정통성을 얼마나 충실히 계승하고 있는지가 질문되며, 무엇보다도 이승만정부와 박정희정부로 이어진 자유대한민국의 역사와 정치체제를 의도적으로 부정하며, 오히려 대한민국건국의 역사를 1919년 3.1운동과 1919년 4월11일 상해임시정부수립으로 보려는 대통령의 주장에서 불신이 증대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수년간 전교조들에 의하여 한국역사가 왜곡되어 우리의 청소년들에게 교육된 좌편향(친북)적인 교육행위들은 결코 한국교회가 외면할 수 없는 중대한 문제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특별히 주목해야 할 것은 우리 대통령이 종교자유를 허용하지 않는 북한을 너무 쉽게 판단하여, “우리민족끼리”라는 단순한 민족감정을 앞세워 그토록 회자되고 있는 연방제통일을 정치적으로 고집한다면,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은 분명히 이의를 제기하고, 전광훈목사와의 반정부투쟁에 함께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단순히 우리사회의 젊은이들을 충동하던 촛불시위논리와 남북화해와 평화통일이란 정치논리만으로는 엄청난 종교박해의 역사를 경험한 한국교회의 지도자들과 성도들을 납득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 대통령과 여야 정치권은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현 정부와 우리 대통령이 참으로 안타깝게 여겨지는 것은 공산주의적이며 사회주의적인 정치체제의 이념실험(1919년-1990년)은 벌써 구소련과 동유럽에서 실패한 작품이며, 폐기처분 된 것이 언제인데, 이제는 대한민국과 한반도에서 그 실패한 이념을 또 실험하려고 선동하고 용납하려는 그 어리석음의 행동입니다. 독일을 비롯한 서유럽의 나라들은 일찍이 공산주의적이며 사회주의적인 정치이념이 개인의 자유를 전제하지 않는 정치상황에서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에, 줄곧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적인 시장경제이념체제를 분명히 전제한 가운데, 자본주의가 초래하게 되는 빈익빈 부익부의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하여 사회주의적인 이념을 접목하여, 동독공산주의와의 체제경쟁에서 서독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문에 이제부터라도 북한이 꿈꾸는 대한민국의 “체제전복”이란 주체사상의 망상에 사로잡혀 위장된 평화와 통일의 주장을 당장 중단하고, 어디까지나 대한민국의 미래는 대한민국의 역사적인 국가체제의 정통성을 가진 자유민주주의체제와 헌법을 존중하는 전제하에, 서유럽의 나라들에서 성공한 기독교적인 사회주의, 또는 사회주의적 정당의 허용을 실험하는 논의를 이제부터 시작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그러한 방식을 조심스럽게 한국정치인들에게 제안하고 싶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 한국의 정당정치에서도 기독교사회주의 정당이나, 사회주의 적인 정당을 허용하는 방향으로 미래정치는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지금까지 견지해 온 자유민주체제와 시장경제체제의 자본주의를 견고히 전제한 가운데서의 허용을 생각하는 것이지, 그 반대는 결코 아님을 이해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미 해방이후 지난 74년 동안 겨루었던 남북한의 정치이념의 체제경쟁은 분명히 북한이 실패한 것이기 때문에, 북한은 핵무기로 더 이상 정권연장을 꾀하지 말고, 동독처럼 솔직히 우리 대한민국에 북한정부를 자발적으로 넘겨주는 것이 최선일 것이며, 만일 더 유지하겠다면, 또 다시 백년의 세월이 흘러간다 할지라도, 성급한 남북통일을 기대하지 말고 지금부터 인도적 차원에서 서로 협력과 경제적인 지원을 통한 교류를 순차적으로 해 나가는 과정을 밟아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우리 대통령은 남쪽 대통령이 아니라, 당당히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서 남북관계를 선도해야 하며, 국제관계를 견지해가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 전광훈 목사를 비롯하여, 수많은 성도들이 왜 광화문에서, 청와대 앞에서 밤을 새며 하나님께 기도하며. 울부짖고 있는지를 현 집권당과 대통령은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납득할만한 대통령의 솔직한 대답을 내 놓아야 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국론분열의 단초를 제공한 분이 대통령이며, 그것을 수습해야 할 분도 바로 대통령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든 한국교회의 목회자들 또한 지금 돌아가고 있는 한국정치의 현안들을 직시하며, 이웃사랑과 나라사랑의 공동의 책임을 함께 짊어지고 갈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한국교회는 그간의 지나친 개인주의적이며 자본주의적인 사고에 물들어 교회의 재산을 사유화하려고 했던 과오를 인정하고, 여러 교파들로 분열시키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인 교회공동체를 이해하지 못했던 실수들을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사랑을 말하면서도 사회적인 약자와 이웃의 공동체를 외면하고 자기 위주로만 살아왔던 개인주의적인 삶을 되돌아보면서 하나님과 국민 앞에 진심으로 참회하는 죄책고백을 공개적으로 드러내 보여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목회자의 나라사랑의 귀중한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한 복음의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일과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일을 모범적으로 수행해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작금에 일어나고 있는 대한민국의 정치적 상황을 예의 주시하면서, 일전에 기독언론지에 설교문(칼럼)하나를 또 발표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12장41-45절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작성했던 것인데, 정확히 말씀드리면, 임우성 목사님께서 기독언론지에 게재하겠다고 설교문 하나를 작성해서 보내주시라고 해서 쓴 글입니다. 제목은 “지금은 대통령을 위해 기도할 때입니다.”라는 한국교회 성도님들에게 호소하는 내용의 글이었습니다. 인용했던 성경본문의 말씀은 한 사람에게서 떠났던 악령이 되돌아와 깨끗하게 수리된 집에 더 악한 일곱 귀신을 데리고 들어와서 그 집을 온통 지배함으로, 그 사람의 형편이 이전보다 더 악해지게 되었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그 단락의 말미에 “이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고까지 말씀했습니다(45). 이 말씀은 예수님의 전체사역이 악령(귀신)을 내쫓는 일임을 제자들에게 상기시키면서, 그러한 일들이 발생한 곳에는 자칫 잘못하면, 도리어 쫓겨난 악한 영들이 더 많이 들어와서 현재의 상황보다 더 악한 상황을 만들게 될 위험이 항상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불행한 사태를 대비하는 유일한 대책은 선한 영들로 그 빈집을 가득 채우게 하는 것이며, 예수님과의 지속적인 관계유지를 통하여 예수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인 성령으로 그 집을 가득 채우게 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우쳐 준 것입니다. 즉 성령의 능력을 힘입고 예수의 복음을 더욱 열심히 전파하는 일임이어야 함을 깨우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존경하는 목회자 여러분, 생각하면 바로 3년 전, 한국정치는 그 당시 박대통령을 탄핵하였고, 우리사회에 만연된 정치권력남용의 적폐(불의)가 청산되며, 불의한 법과 제도가 고쳐지는 정치개혁의 과제를 안고, 새로운 대통령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리고 문대통령은 취임사를 통하여 ‘기회는 평등하며,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운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말한 공약(의지)은 국민들에게 큰 감동과 기대감을 갖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2년 반이 지나는 지금, 대통령의 공약은 빈공약이 되어가는 듯하며,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한 그 말은 바로 지금의 이러한 혼란스러운 나라를 말한 것인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도 됩니다. 역시 정치인의 레토릭(수사)은 참으로 현혹스럽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 때가 그토록 국민의 불신을 받던 법무부장관후보자를 임명한 때였습니다. 매스컴의 연일 보도는 자신뿐 아니라, 그의 가족의 불의한 행태들이 알려지면서, 오히려 문정부의 인물들이 적폐의 대상임을 국민들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후보자 지지자들과 반대자들의 소요는 광화문과 서초동에서 극을 치닫고 있는 모습이 지난 10월 이었습니다. 이러한 대통령의 정치행위는 더 심각한 국론분열로 이어졌고, 결국 우리 사회는 참으로 악한 영들에 지배당하는 정황으로 돌변하였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저의 마음에는 우리 문대통령이 또 탄핵당하면 어쩌나 하는 염려와 함께 예수님의 이 본문말씀이 생각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악한 세대가 또한 그렇게 되리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사회가 3년 전에 박근혜정부의 부패와 불의를 비난하면서 대통령을 탄핵했던 일이 또 다시 반복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지금 한국교회는 대통령을 위하여 기도할 때입니다”라는 제목으로 한국교회의 성도들에 기도를 호소하였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우리사회의 국론이 분열되지 않고, 우리 대통령이 국민의 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며, 정치가 화합과 안정을 되찾고, 우리 국민들의 염원인 올바른 사법개혁이 이루어지며, 평등하며 공정하며, 정의로운 사회로 발전되도록,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임하게 되기를 기도할 것을 제언했던 것입니다. 또한 우리 대통령은 참으로 포용적인 리더십을 발휘하여 지지자만이 아니라, 반대자의 대통령이 되어 남남갈등을 극복하며, 마침내 남북평화통일의 초석을 놓는 일에 크게 기여하는 대통령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기를 호소했던 것입니다.

존경하는 목회자 여러분, 저는 지금까지 목회자의 나라사랑하는 방법의 지극히 소극적인 태도(기도하는 일)를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적극적인 방법 한 가지를 더 말씀드리고 강연을 끝내려 합니다.

3. 그러면 목회자의 나라사랑의 적극적인 방법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수많은 교파들로 분열된 한국교회가 하나로 연합하는 방법입니다. 그간 한국교회가 분열하면서도 연합활동을 중요하게 여기고, 또 여러 개의 연합체들이 생겨나 있기도 합니다(한기교연, 한기총, 한교연, 한장총, 한장연, 한교총). 그러나 이러한 연합기관들은 저의 소견으로는 제 역할을 잘 감당하지 못하는 것 같아 역시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러한 때에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연합기관에서 목회자의 나라사랑의 방법을 적극적으로 대처한다면, 개인이 각각 행동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큰 힘을 발휘하게 되리라 기대합니다. 전도서 4장11-12절을 인용하면,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 하느니라” 아멘! 

한국교회가 이와 같이 하나로 연합하여 해야 할 책무는 크게 5섯 가지로 봅니다.

첫째는 전 세계의 복음전파를 위하여 함께 모여 선교전략과 방법을 협의하여 세워야하며, 둘째, 사회봉사의 역할을 감당하며, 셋째, 이단적인 가르침을 방어하고,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며, 넷째. 신앙의 가르침을 통일시키며, 다섯째, 대사회, 대정부 및 정치, 대 북한, 대 국제적으로 대두되는 다양한 문제들에 대하여 한국교회의 입장을 대변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한국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영향력을 사회적으로 더 크게 미치게 되리라 기대합니다.

“국제독립교회연합회”는 바로 그러한 일들에 모범을 보이며, 흩어진 한국교회가 서로 연대하여 이러한 목회자 나라사랑의 방법을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지혜를 제공하는 역할을 감당해 내기를 소망합니다. 그간 국제독립교회연합회는 이름 그대로 기존 교회들이 지나치게 교권의 인위적인 권위로 간섭하며 군림하는 비 복음적인 지나친 교회제도를 멀리하고 자유로운 목회활동을 염원하는 분들이 모여 형성된 연합회인줄 압니다. 저도 사실 그러한 복음의 자유를 실현하는 듯 한 모습이 좋아서 함께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국제독립교회연합회야말로 모든 교단들과 연합하여 나라사랑에 모범을 보여주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안으로는 동역자의식으로 결속하며, 공동체의 하나 됨인 연대를 힘쓰며 서로 협력하며, 밖으로는 국가적인 위기를 직시하며, 나라사랑에 하나 되어 이 시대에 우리 주님이 원하시는 일들을 잘 감당해 가는 신실한 국제독립교회연합회가 되기를 진심으로 소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전 총신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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