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 수 강 목사

왜 또 대한민국에 생활고로 인한 일가족 네 명 음독자살 사건이 일어났는가? 이제 명실 공히 대한민국은 개발도상 국가를 졸업하고 선진국으로 진입했는데 말이다. 국민소득이 금년을 기준으로 3만 불이 넘었다. 국민소득이라면 국민 전체 평균이 바로 삼만 불이라는 의미라고 본다. 그런데 자살한 가족은 왜 삼만 불에서 소외되어 온 가족이 자살을 선택하였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사건이다. 오늘의 복지는 과거에는 생각조차 못했던 복지 혜택이 그 종류도 다양하다. 대한민국 국민들이 복지 종류를 다 알고 있는지는 몰라도 대부분 나에겐 어떤 복지가 해당되는지도 잘 모르는 국민들이 대다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그런데도 복지 사각지대는 늘 존재하고 있으니 할 말이 없다.

법적으로 파산선고를 받아 빚에 대해 유예 기간을 갖고 점차 빚을 갚아 나가도록 하는 각종 제도가 있는데도 나의 형편에 도움이 되는 혜택이 무엇인지 몰라서 이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국가의 도움을 신청하려고 해도 자신들은 생활보호 대상도 아니기 때문에 행정관서의 도움을 받으려고 해도 자신들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 같아 좀처럼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다. 어려운 주민들을 위해 구청 읍면동사무소에는 SOS라는 제도도 있다고 한다. 말 그대로 긴급하게 도움이 필요한 분에게 다소나마 혜택이 되는 제도라고 한다. 그런데 대부분 이러한 제도가 있는지도 모른다.

사회에 한 구석에서 일가족이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하는데 유서를 유일한 증거로 보지만 내용은 한마디로 가난으로 인한 사업실패가 원인이기도 하지만 어려울 때에 하소연을 들어줄 누군가가 아무도 없다는 현실이 안타깝다. 자살을 선택한 가족은 자신들로 인해 남을 괴롭게 하지 않고 신세를 지지도 않고 세상을 마감해야 하는 극단적인 선택은 어떻게 보면 그들은 너무 청순하고 결백하기 때문에 이러한 선택을 하였을지도 모른다는 견해다. 유사한 사건이 잊을 만하면 또 발생하는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관계 기관과 학자들은 유형을 분석하여 재발방지를 위해 국가적인 새로운 정책이나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 사실 어떻게 보면 일가족은 대한민국에 살고 있었으나 삶의 애매한 위치에서 자신들의 고단한 삶에 대해 이야기할 상대가 없었다고 본다.

이러한 사고가 일어날 때마다 국가를 탓하거나 지방자치단체를 나무라는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지만 동일한 사건을 계속하여 일어나고 있다. 가난은 나라도 구제를 하지 못한다는 말도 있듯이 정부가 일일이 급하게 어려움을 겪는 자들을 다 파악 할 수는 없음을 안다. 그리고 읍면동사무소에 인력 부족으로 관내 거주하는 자들 가운데 어려운 가정이나 독거노인들을 파악은 하고 있으나 긴급하게 구호를 요청하는 자들 까지는 아직 파악이 부족함도 알고 있다. 그래서 이 일은 국가나 지방정부에 맡겨 모든 구호 처리를 하게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국가가 다 감당 못하는 부분을 종교단체가 맡는 것도 종교인의 소명 가운데 하나라고 본다. 그런데 종교는 제살 찌우기에 급급하니 말이다.

특히 종교군 가운데 기독교의 교세는 세계가 인정하고 있다. 한국기독교회가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 가운데 하나는 신자들의 헌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분명해야 함도 하나다. 헌금이 가난하고 소외된 불우한 이웃과 과부와 고아 그리고 홀로된 노인들을 위해 사용한 흔적이 사도행전에 기록이 있다. 현대교회가 초대 교회교인들처럼 집과 밭을 매도한 금액을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다 놓고 집사들은 이 재원을 구제대상들에게 나누어 준 대로 실행에 옮기는지 알 수도 없다. 현재 교회는 물론 구제도 하겠지만 교회가 복잡한 계획을 실행하느라 사용해야 할 부분이 너무 중과부적이어서 딱히 구제에 만 헌금 사용을 망설이고 있다고 볼 수도 있는데 과연 옳은 일인지 구분이 안 된다.

그런데 문제는 현대교회가 잘하는 일인지 못하는 일인지 나중에 후손들이 평가할 일이지만 지금 교회는 헌금 사용의 제일 큰 목적은 예배당 건축이다. 한국교회 중에 구제를 목적으로 집을 팔고 땅을 팔아 교회에 허납하였다는 기록은 볼 수 없다. 이는 교회가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인 성경과는 조금은 다른 면이라고 생각된다. 한국교회가 세상에 존재하는 근본 목적을 수행하려 한다면 주변의 소외된 자들을 일일이 파악하여 그들의 형편을 살펴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어야 한다. 지금 한국교회는 무엇을 위해 세상 존재하는지에 대해 심사숙고해야 한다.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했는데 전혀 빛의 소명도 소금의 소명도 다 잊어버린 느낌이다. 맛 잃은 한국교회 다시 회생 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그 길은 어려운자들을 내 몸처럼 돌봄이 아닌지?

필운그리스도의교회/ 본지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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