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 성 길 목사

직장 생활을 하다가 미국으로 이민을 간 이민자가 있다. 이런저런 고생을 하다 보니 세월이 많이 흘렀다.

30대에 미국의 갔는데 50의 나이를 훌쩍 넘기고 말았다.

고국을 떠나 이민생활이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고국을 떠나 외국생활을 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떠돌이 생활이다.

오늘 대한민국도 이민자들이 많다. 이들의 생활이 곤궁하다는 기사가 매일 언론을 통해 보도되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도 다민족이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가나안에 정착했다. 그리고 그곳에 나라를 세웠다.

미국으로 이민간 사람은 어느 날 3일의 휴가를 받고 고국을 찾았다. 비행기를 타고 오는 내내 어머니 얼굴이 눈에 선 했다.

버선발로 뛰어나와 아들을 안아 주시리라, 아들의 얼굴을 쓸고 또 쓸며 "내 아들, 고생 많았다." 해 주시리라 생각했다. 어머니 뵐 기쁨에 한 달음에 고향집에 달려갔는데, 어머니가 조금 이상했다. 아들의 이름을 불러 주지도 않고, 그저 멍하니 타인을 보듯 했다. 그동안 곁에서 어머니를 돌봐 오던 누나가 말했다. 그동안 어머니가 기억을 잃었다고...... 아무도 알아보지 못 하신다고......

"아니야, 엄마가 나를 몰라보실리가 없어."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에게 "뉘신지요?" 라는 말만 되풀이 했다. 억장이 무너지는 듯한 아픔에 아들은 누나에게 말했다.

"휴가를 엄마와 보내고 싶어. 나에게 3일의 시간을 줘. 엄마와 단둘이서 이 고향집에서 지내게 해줘. 그러면 엄마가 나를 알아보실 거야."

3일 동안 오롯이 어머니와 아들, 단 둘이서만 고향 집에서 지냈다. 아들은 어머니에게 옛날 기억들을 하나 하나 꺼내 이야기했다.

"엄마, 손등에 이 상처 생각나요? 나 일곱 살 때인가, 엄마랑 시장에 가서 한눈팔다가 오토바이에 부딪혔잖아요. 그때 엄마가 나를 업고 병원까지 뛰어 갔지요."

그러나 엄마는 그 어떤 이야기를 해도 아들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렇게 약속된 3일이 훌쩍 흘러가고 말았다. 이제 30분만 지나면 어머니와 다시 작별해야 한다. 이대로 헤어져서 미국에 가면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

"엄마, 제발 날 좀 기억해 주세요. 내 이름을 불러 주세요. 그러면 힘이 날 것 같아요."

아들은 눈물 어린 얼굴로 무심코 노래를 불렀다. 엄마가 잘 부르던 민요 가락이었다. 그때였다. 아무 말 없던, 아무 기억도 못하던 어머니가 그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니겠는가.

아들을 업고 일을 할 때 흥얼거리던 노래, 학교 갔다 오는 아들을 기다리던 골목에서 흥얼거리던 노래, 그 노래가 어머님의 기억을 돌려 놓았다.

"아들아, 내 아들......"

어머니는 아들을 안았다. "내 아들, 고생이 많구나." 하며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노래가 불러온 어머니의 기억은 10분을 넘기지 못했지만, 아들은 어머니의 품속에서 마음 놓고 울었다. 그리고 그 10분 동안 실컷 고백했다.

"나를 기억해 줘서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어머니가 나의 어머니여서 행복합니다‘

새세움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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