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 보 연 교수

서울대학교 어느 학생의 생활 수기는 풍요로움 속에서 살아가는 오늘의 아이들에게 감동을 준다. 어릴 적 곤궁한 삶 속에서 구멍난 운동화, 양말, 책가방 등이 생각난다. 이것은 모두 옛이야기가 되었다. 지금은 하나의 추억으로 친구들을 만나면 이야기 한다. 오늘의 아이들에게 구멍난 운동화와 양말, 팬티의 이야기를 하면, 이해를 할 수 있겠는가. 서울대학교의 이 학생은 “어릴적 실밥이 뜯어진 운동화, 지퍼가 고장 난 검은가방, 그리고 색 바랜 옷~ 내가 가진 것 중 헤지고 낡아도 창피하지 않은 것은 오직 책과 영어 사전 뿐이다”고 글을 썼다.

집안 형편이 너무 어려워 학원수강료를 내지 못했던 이 학생은 “칠판을 지우고 물걸레질을 하는 등 허드렛일을 하며 강의를 들었다”고 했다. 수업이 끝나면 지우개를 들고 이 교실 저 교실 바쁘게 옮겨 다녀야 했고, 수업이 시작되면 머리에 하얗게 분필 가루를 뒤집어 쓴 채 맨 앞자리에 앉아 열심히 공부했다. 엄마를 닮아 숫기가 없는 이 학생은 오른쪽 다리를 심하게 절고 있는 소아마비였다.

이 학생은 생활수기에서 자신이 장애인이었다는 것과 자신의 어려운 삶을 낫낫이 적어 내려갔다. 그러면서도 움츠리지 않고, 미래의 희망을 가졌다. 어머니가 좌판에서 팔던 고등어 등짝처럼 싱싱하게 살아 움직였다. 그는 고백했다.

“짧은 오른쪽 다리 때문에 뒤뚱뒤뚱 걸어 다니며, 가을에 입던 홑 잠바를 한겨울에까지 입어야 하는 가난 속에서도 나는 이를 악물고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그러던 추운 어느 겨울날, 책 살 돈이 필요했던 나는 엄마가 생선을 팔고 있는 시장에 찾아갔다. 그런데 몇 걸음 뒤에서 엄마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차마 더 이상 엄마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눈물을 참으며 그냥 돌아서야 했었다”

이 학생의 엄마는 생선을 팔아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졌다. 낡은 목도리를 머리까지 칭칭 감고, 질척이는 시장 바닥의 좌판에 돌아 앉아 김치 하나로 차가운 도시락을 먹고 계셨던 엄마를 보는 순간 다가 갈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마음을 다시 한 번 다잡았다, 졸음을 깨려고 몇 번이고 머리를 책상에 부딪혀 가며 밤새워 열심히 공부했다.

“가엾은 나의 엄마를 위해서……. 내가 어릴 적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엄마는 형과 나, 두 아들을 힘겹게 키우셨다. 형은 불행히도 나와 같은 장애인이다. 중증 뇌성마비인 형은 심한 언어장애 때문에 말 한마디를 하려면 얼굴 전체가 뒤틀려 무서운 느낌마저 들 정도이다. 그러나 형은 엄마가 잘 아는 과일 도매상에서 리어카로 과일 상자를 나르며 어려운 집안 살림을 도왔다. 그런 형을 생각하며 나는 더욱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그 뒤 시간이 흘러 그토록 바라던 서울대학교에 합격하던 날, 합격 통지서를 들고 제일 먼저 엄마가 계신 시장으로 달려갔다”

좌판을 등지고 앉아 꾸역꾸역 찬밥을 드시고 계시던 엄마에게 서울대학교 합격소식을 전했다. 이 학생은 눈물 때문에 더 이상 엄마 얼굴을 바라 볼 수가 없었다고 고백했다. 엄마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나를 꼬옥 안아 주셨다. 그날 엄마는 찾아오는 단골손님들에게 함지박 가득 담겨있는 생선들을 돈도 받지 않고 모두 내주셨다. 그리고 형은 자신이 끌고 다니는 리어카에 나를 태운 뒤 입고 있던 잠바를 벗어 내게 입혀 주고는 알아 들을 수 없는 말로 동생인 나를 자랑하며 시장을 몇 바퀴나 돌고 돌았다.

그때 학생은 시퍼렇게 얼어 있었던 형의 뺨에서 기쁨의 눈물을 보았다. 그리고 가족들의 사랑을 느꼈다. 가족 모두가 구석의 순대국밥집에서 외식을 했다. 엄마는 지나간 모진 세월의 슬픔이 북 받치셨는지 국밥 한 그릇을 다 들지 못 하시고 그저 색 바랜 국방색 전대로 눈물만 찍으며 돌아가신 아버지의 얘기를 꺼냈다. 사람은 누구는 삶에 굴곡이 있다. 모든 사람은 사랑과 성공을 너무 쉽게 얻으려 하고, 노력도 해보기 전에 너무도 쉽게 포기하려 한다.

굿-패밀리 대표•개신대 상담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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