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츠빙글리의 성경관
인문주의 신학문과 전통적 로마 가톨릭 신학을 받은 후, 츠빙글리 (1484-1531)는 루터와는 전혀 독립적으로 스위스에서 자신의 개혁신학을 제시하였다. 츠빙글리는 루터의 가르침을 통해서가 아니라, 성경과 스위스 지역사회가 당면한 문제해결을 시도하면서 종교개혁자가 되었다. 츠빙글리가 루터의 글을 읽고 참고했지만, 그는 루터를 자신의 동료개혁자로 생각하였다. 츠빙글리가 루터로부터 깊은 신학적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는 거의 없으며, 훗날 츠빙글리는 자신이 성경에 기초하여서, 전혀 루터와 관련성을 갖지 않은 채, 독립적으로 개혁신학을 발전시켰다고 주장했다. 루터 역시 츠빙글리에 대해서 “다른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고 취급하였다.
1)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개혁운동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에서 결정적으로 두드러진 점은 성경의 절대 권위에 바탕을 두고 전개 되었다는 점이다. 로마 가톨릭에서 벗어나게 만들어준 그의 놀라운 종교개혁 사상들과 빛나는 기여들은 모두 다 그의 성경 해설과 설교 속에서 주어졌다. 그는 깊은 성경연구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담겨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압도되어지는 감화를 받았다. 성경의 독특한 특성과 기능에 대한 신념을 확실하게 터득한 츠빙글리는 전통이라는 허울로 혼란을 부채질 하던 로마 가톨릭과 결별하였다. 츠빙글리는 개혁주의 교회의 중요한 핵심적인 신학의 주제들로써, 말씀과 성령에 의한 예배, 그리스도와 구원사역으로서의 미사철폐, 성례와 상징적 인식, 용병제도의 철폐, 국가와 세속군주 등에 대해서 강조했다.
츠빙글리는 스위스 전지역에서 가장 앞장서서 로마 교황청의 오류를 용감하게 지적했고, 미사의 철폐와 성상 제거를 위해서 투쟁하였다. 츠빙글리는 예배에서 말씀 강해를 중심으로 하는 최초의 개혁교회를 정착시켰고, 그러한 교회의 변화만이 아니라 사회의 병폐를 고치고 국가를 새롭게 정비하도록 새로운 인식을 불러일으켰다. 가난한 사람들이 교황청을 위해서 전쟁터에 나가는 용병제도를 중단할 것을 호소했다. 전통을 중시하고, 교황의 가르침에 의존해서 행동하던 로마 가톨릭파 캔톤들은 츠빙글리 진영을 무찌르고자 군대를 파견하였기에, 여러 지역에서 전쟁이 벌어졌고, 사회정치적으로 엄청나게 큰 파장을 일으켰다.
성경에 대한 결정적인 이해와 새로운 인식을 얻게 되어는 과정에서 츠빙글리는 어거스틴, 비텐바흐, 에라스무스를 통해서 도전과 자극을 받았다. 비엔나와 바슬레에서 인문주의를 수학하는 동안에, 츠빙글리는 에라스무스와 만났었고 큰 영향을 받았다. 에라스무스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이라는 기독교철학을 발전시켰는데, 도덕적 윤리적 중생과 개혁에 희망을 가졌다. 이러한 에라스무스의 사상적인 뿌리는 초대교부들 중에서 제롬과 오리겐으로 추정되어지고 있는 바, 어거스틴의 영향력은 다소 미약하다고 평가되어진다. 바젤 대학교에서 고전적인 스콜라주의 학자들과 일부 인문주의자들에게 수학한 츠빙글리는 철학적 체계로서 생활과 도덕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였다. 츠빙글리는 에라스무스가 펼쳤던 “그리스도의 철학”에서 깊이 영향을 받았는데 본질적인 내용은 교회에서의 생활에 관한 것들이었다. 츠빙글리의 초기 사상에서 강조하는 도덕적 갱신은 에라스무스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1516년부터 글라루스 근처 아인지델른 교구에서 성경을 강해하면서 유명한 강사가 되었다.
<계속>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