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 사 랑 목사

‘솔로몬이 여호와의 제단 앞에서 이스라엘의 온 회중과 마주서서 하늘을 향하여 손을 펴고/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위로 하늘과 아래로 땅에 주와 같은 신이 없나이다/주께서는 온 마음으로 주의 앞에서 행하는 종들에게 언약을 지키시고 은혜를 베푸시나이다/주께서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에게 하신 말씀을 지키사 주의 입으로 말씀하신 것을 손으로 이루심이 오늘과 같으니이다…(중략)…주의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 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께서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열왕기상 8장22-30절)

맘몬과 바벨에 길들여진 오늘 한국교회는 호화로운 교회당에 신을 가두어 버리지는 않았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분명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인 한사람 한사람이 모인 신앙공동체이다. 즉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이는 신앙공동체이다. 솔로몬은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고, 그 때처럼 기쁜 때가 없었다고 했다. 성전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두는 곳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작은 공간에 머물지 않으시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우주만물을 주관하신다.

만약 하나님이 성전에만 머물러 계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성전, 좁은 골방에 가두는 것과 다르지 않다. 분명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에 예속되지 않으신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우주만물을 주관하신다.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은 더럽힘을 당했다. 예수님 시대 예루살렘 성전은 헤롯의 손으로 건축되었다. 그러나 유대교가 형식화되면서, 하나님을 성전 하나님으로 만들어 버렸다.

당시 교회에 올 수 없는 문둥병자, 소경, 창녀, 하루를 벌어 하루를 먹고사는 사람들은 교회에 갈 수 없었다. 율법에 의해 철저하게 더욱더 소외되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 제자들에게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고 당당하게 말씀하셨다,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예수께서 이르시되 ㄱ)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중략)…/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마태복음 12장1-8절)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존재방식은 교회 안, 우리가족 안, 노동자들 속에 계시면서도, 안계시다. 성육신하신 예수님은 고난도, 죽음도 이기셨다. 우리는 성육신하신 주님을 위해 감사해야 한다는 것은 존재론적인 감사이다. 우리는 자유케 하신 주님, 섬기게 하신 주님께 감사해야 한다.

오늘날 근심걱정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삶이 무의미하다. 감사할 줄을 모른다. 재벌 4세들이 마약에 도취되어 있다. 이들의 삶이 무의미한 것은 부모의 경제로 근심 걱정없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기복 없이 부모의 돈으로 호의호식하며 살아왔다. 지금 당장 풍파가 닥쳐오면, 헤쳐 나갈 수 있는 능력이 없다. 풍파를 겪으며, 굴곡진 삶을 산 사람은 어떠한 역경이 닥쳐와도, 헤쳐 나갈 수 있는 힘이 있다.

수능시험의 계절이다. 인류대학을 졸업한 사람은 국내에서 성공했다는 말을 들을지 모르지만, 국제적으로는 기여하지 못한다. 오늘 국제적으로 기여하는 사람은 시골학교를 졸업한 지지리도 못한 사람이다. 우리의 일상적인 기도는 안일함을 추구한다. 근원적인 감사을 드리지 못한다.

근원적인 감사를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은 고난이 지금 당장 쓰라림으로 다가오지만, 성육신하신 창조주를 위해서 기도한다.

우리는 오늘도 살아 있다는 것에, 가족의 공동체가 된 것에,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에 감사하며, 소망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신 하나님께 오늘의 삶의 현장에서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보자.

마라나타 세기총 대표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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