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병 균 목사

1985년이면 당시 전두환 군부독재의 서슬이 시퍼런 때였다. 당시 전국의 교도소에는 민주화와 통일, 노동3권을 외치다가 잡혀간 양심수들이 차고도 넘쳤다. 압제 속에서도 대학생들의 시위는 그치지 않았다.󰡒민(民) 초(草)다󰡓풀은 거센 바람이 불면 잠시 눕는다. 누울 뿐 다시 일어난다. 전두환 독재의 민주인사탄압, 언론통폐합, 체육관 선거에 신물이 난 운동권 대학생, 민주시민들이《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소리가 언론과 기습시위현장에서 산발적으로 부르짖던 때였다.

이 때 한국교회의 전위(前衛)에서 개신교 인권운동계를 이끄는 장성용ㆍ김동완ㆍ이명남ㆍ이해학 목사와 같은 필자의 선배구룹 인권목사들과 김영주(후에 NCCK 총무) 목사를 비롯한 소장파 목사들 30여명이 언필칭《민주의 성지(聖地)》라고 불리우는 광주에 찾아왔다. 광주ㆍ전남의 기장, 예장통합, 성공회 등의 교단에 속한 인권목사들과 합류했던 것이다. 소수였지만, 광주의 평신도 지도자인 윤용상ㆍ안성례 장로들과 함께 손에 피켓을 들고 5ㆍ18 민주영령들의 한맺힌 절규가 들려오는 전남도청 앞(현 아시아문화전당) 분수대 주위를 돌았다. “직선제 개헌” “전두환 정권 물러가라” “독재타도”를 목청껏 외치면서 가두시위를 했다. 당시 정보경찰들이 시위대를 엄호(?)만 했지 연행을 안해갔다.

이후 목회자들은 광주 유동 YWCA 4층 소강당에 모여서《전국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제 3회 정기총회를 열었다. 여기에서 예장 통합 소속 이명남 목사(1941-2019년)가「목정평」(약칭) 3대 회장에 선출되었다. 이 떼 필자는 이명남 목사를 처음 만났다. 당시는 학생운동권들이 민주화 시위를 주도하고 있을 때였다. 노동운동이나 농민운동은 진보성향의 개신교 교단과 가톨릭 인권단체의 보호 속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광주에서도 NCC, YMCA, YWCA나 국제적인 인권단체인 엠네스티( Amnesty)가 민주화ㆍ인권운동의 견인차(牽引車)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명남 목사는 대전 성남교회 출신이다. 충청도 지역은 일반 시민, 민중운동이 타지역에 비해 출발이 늦었다. 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선구자는 단연 이명남 목사를 비롯한 몇몇 개신교 인권목사들이었다. 교단 내 개혁운동의 선구자로서 최초로 '예목협' 의장을 지냈다. 87년 6월 대항쟁 당시《새문안 교회》시위를 주도한 것도 이명남 목사를 필두로한 예장통합내《목정평》후배들이었다. 물론 당시에 배후에는 총회장이었던 김형태 목사와 조남기ㆍ금영균 목사 등이 있었다. 에큐메니칼 운동에도 앞장 섰다. 예장인권운동을 대표해서 KNCC 인권센터 이사장을 지냈다. 대전ㆍ충남지역민주화운동에도 대부역할을 했다.

이명남 목사의 목회와 생활은 더욱 감동적이다. 충남 당진읍의 전통적인 장로교회에서 36년 간 시무하고 은퇴하시기까지 중부권(충청남북도, 강원)을 대표하여 많은 후배들을 이끌어 내었다. 인권선교, 사회선교 회의와 운동이 전국 어디에서 열려도 서울에서고, 부산에서고 회의를 마치면 반드시 본교회로 돌아간다. 이유는〈새벽기도회〉를 인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충남당진은 교통도 불편한 곳인데 이 머나먼 길을 밤중에 택시로 본교회를 향해 가는 것이다. 인권운동과 목회를 함께 다 잘하기가 어려운데 이명남 목사는 모두를 잘 했다. 노회정치도 총회정치까지 정의와 화해의 편에 서서 바른 소리를 하면서도 갈등을 조정하는 화해자의 역할도 잘 감당했다.

필자가 1995년 “범민련 29인사건” 즉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강희남 목사 등과 함께 구속되었을 때, 면회는 물론 석방운동차 광주를 13회나 방문했다. 석방기도회, 보안수사대ㆍ검찰청ㆍ법원 방문, 탄원, 석방기도회 등으로 찾아온 것이다. 당시 필자는 1991년 노태우 정권 당시 “폭력정권퇴진”을 외치다 분신한 박승희, 정상순, 김철수 열사 등 광주분신정국 당시 집회 주동자로서 지목되어 불구속 재판을 받아 징역 2년에 집유 3년을 받은 집행유예 기간에 구속되었기에, 국보법 등 사건에서 구형 4년을 받았으니 최소한 3-4년 징역은 받아논 밥상이었다. 석방운동의 최전선에 이명남 목사, 석방위원장 지원재 목사, 전남노회 인권위원장 이동균 목사, 예장농목, 목정평, 노회 내 동역자들 지역사회 재야시민단체 회원 등이 있섰다. 노회와 총회에서도 최선을 다했다. 결국 구속만기로 석방되어 고법에서 다시 집행유예로 형이 확정되었다. 정의와 사랑의 표상이신 이목사님 진실로 감사합니다.

필자가 30여년 이상 후배로서 모시다 보니 이명남 목사는 천성(天性)이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불의와는 타협이 없었고, 굽힘도 없었다. 인권, 민중, 노동, 농민목회자가 어려운 것이 교인이 잘 안모이고, 재정이 부족한 것이 공통적인 아픔이다. 그런데 이명남 목사는 충남 당진교회에 일찍이 신협을 설립하여 교인들 뿐 아니라 지역주민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교회의 장로들과 성도들이 “우리 목사님 인권선교현장에서 꼭 필요한데 쓰세요”라고 특별히 예산을 세워주었다” 어디서나 밥값은 이명남 목사가 선선히 내놨고 인권선교 기금을 모금할 때면 큰 몫을 감당했다. 이명남 목사는 흔한 목회학 박사도 하지 못했다. 총회장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선한 이웃이었고, 인권선교 동역자들의 맏형이었다. 한국에큐메니칼운동의 대표주자였다.

"이목사님 이제 모든 짐을 내려놓고 천국에서 편히 쉬세요” “부활의 영으로 우리와 함께 하셔서 한국교회 개혁과 자주ㆍ민주ㆍ통일운동에 함께갑시다” 이목사님께 받은 사랑은 일일이 쓸 수도 없다. 나 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자상한 형님이요, 어른이요, 참 목사였다. 오직 예수 정신으로 산 참 신앙인이었다. 사모님과 자녀들의 고생은 오죽 했으랴! 한국교회여, 목회자들이여, 성도들이여, 필자여 참된 목자 예수님과 한국교회 인권목사의 표상인 이명남 목사의 생애를 깊이 생각해 보시라!

NCCK 인권센터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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