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 태 영 목사

마태는 마굿간에서 태어난 아기를 예수·그리스도·임마누엘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이 이름들은 모두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대에 걸쳐 기다리고, 바라고, 염원하던 공동체의 혼이 담겨 있다. 아기 예수는 자연인이 성장하여 큰 인물이 되신 것이 아닌 처음부터 한 무리의 염원과 세계 인류의 염원을 몸에 지니고 태어나신 것이다. 이 이름들 가운데 특별히 <임마누엘>이 지닌 의미를 생각해본다.

첫째, 임마누엘은 죄의 속박에서 풀려나게 하는 힘이 있다. 인류는 죄와 싸워서 이겨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자기 힘으로는 죄와 싸워서 이길 수 없고, 죄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다. 사도 바울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롬 7:24)고 탄식한 이유이다. 오직 임마누엘 주님이 함께 하실 때만이 죄로부터 해방을 받을 수 있다.

둘째, 임마누엘은 죽음과 대면하는 힘이 있다. 아무리 힘센 인간이라도 죽음 앞에 서게 되면 절망할 수밖에 없다. 그만큼 죽음이란 강렬한 절망을 수반한다. 하지만 임마누엘 신앙이 있다면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힘을 가지게 된다.

셋째, 임마누엘은 삶의 의미를 상실한 이들에게 희망을 일깨워주는 힘이 있다. 시편 시인은 “나를 어여삐 여기시고 산 위에 든든히 세워 주시던 야훼께서 얼굴을 돌리셨을 때에는 두렵기만 하였나이다”(시 30:7)라고 탄식하였다. 믿는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얼굴을 외면해 버리는 것보다 더 절망적인 때는 없다. 바로 이럴 때 임마누엘 신앙은 참으로 위로와 힘이 된다.

이처럼 임마누엘 신앙은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과 인생을 바라보게 한다. 저 옛날 아하스 왕은 시리아와 동맹을 맺어 앗시리아를 대적하겠다는 궁리를 했으나, 결국 외세에 의존함으로써 다윗 왕조의 몰락을 가져왔다(사 7:14). 그에게 임마누엘 신앙이 없었던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 임마누엘로 오신 예수에게서 ‘복음’을 보았다. 대림절은 아기 예수께서 임마누엘로 오시는 절기이다. 예수를 영접하는 이는 누구나 임마누엘의 은총을 누린다.

삼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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