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명식 목사.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의 낮은 자들을 사랑과 헌신으로 섬기기 위해 오신 뜻 깊은 날인 성탄절이 코앞이다. 저마다 교회들은 아기예수의 탄생을 기념하고 축하하기 위해 각양각색의 준비에 한창이다. 어둠을 빛으로 밝힌 예수처럼, 트리와 교회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형형색색의 불빛이 캄캄한 밤하늘을 빛내고 있다. 마음까지 따뜻해지는 풍경이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가슴 한편이 쓰리다. 작금의 대한민국은 ‘온 땅의 평화’와는 사뭇 다른 형국이다. 곳곳에서 갈등의 상처가 심하다. 국론이 분열되어 진보와 보수가 칼같이 대립하고 있다. 빈부의 격차는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오죽하면 분단의 아픔을 겪고 있는 남북갈등보다 남남갈등이 더 첨예하다는 분석까지 나오겠는가. 문제는 이러한 갈등구조가 점점 고착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불특정 다수를 향한 증오의 범죄가 날로 증가하고 있는 것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이러한 갈등상황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장로교가 무려 300여개가 넘는 교단으로 분열된 사실만 봐도 알 수 있으며, 한국교회를 대표한다는 연합단체마저 여러 개로 쪼개져 서로가 정통이라며 외치고 있다. 개교회도 성장주의에 빠져 이웃 교회와의 경쟁 아닌 경쟁을 펼치고 있으며, 한 명의 성도라도 더 차지(?)하기 위한 처절한 다툼이 곳곳서 일어나고 있다.

말 그대로 사회나 교회나 화평과 평안보다는 분열과 갈등으로 점철된 모습이다. 예수는 이 땅에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셔서 나눔과 섬김으로 소외된 이웃들을 섬겼다. 오늘 사회와 교회의 모습과는 정반대다. 내가 낮아지고 남을 높이면 자연스럽게 갈등의 원인이 사라진다. 꼭 내가 남보다 더 낫다는 생각에서 분열과 갈등의 불씨가 살아난다. 작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내’가 아닌 ‘너’, 더 나아가 ‘우리’가 되어야 한다. 모든 일에 ‘우리’가 먼저 나온다면 결코 사회나 교회나 갈등의 골이 깊어질 이유가 없다.

아기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성탄절을 맞아 이제 우리 사회가 ‘내’가 아닌 ‘우리’로 전환되길 기대한다. 그리고 그 역할을 우리 한국교회가 하기를 소망한다. 특히 지금까지 한국교회의 문제가 발생될 때마다 고개를 들지 못했던 우리 교회 지도자들이 솔선수범해서 한국교회가 본질을 되찾을 수 있도록 이끌었으면 한다. 잘못한 것이 있으면 통회자복해서 바른 길로 나아가려는 노력을 다하길 바란다.

무엇보다 한국교회가 정치와 권력에 눈길을 돌리지 말고, 이 땅에 소외된 이웃들을 향해 눈과 귀를 집중했으면 좋겠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가 몸소 보여주셨던 그 행동 그대로, 이천년을 지나 오늘 우리 한국교회가 가난한 자, 굶주린 자, 억압받는 자, 갇힌 자 등 소외된 이웃들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서주길 기대한다. 지금까지 잘해왔다고 자부한다면 더욱 더 박차를 가하고, 조금은 미약하다면 땀 흘려 그들의 손과 발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이 나라와 한국사회를 위기에서 건져낼 최후의 방법임을 명심해야 한다.

2019년 성탄절이 교회만의 축제로 끝나지 않고, 이 나라와 민족, 한국교회가 다시 살아나는 계기가 되길 염원한다. 거리에 공허한 캐롤만 울려 퍼지지 않고, 아기예수의 탄생을 진심으로 축하하는 축복의 찬송이 울리길 기도한다.

기하성(순복음) 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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