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 종 문 목사

성탄절을 아름답게 보낸 한국교회를 향해 2020년도에는 성전 예수를 세상 밖으로 불러내 새로운 미래를 열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성탄절에 담긴 뜻을 제대로 알고 성탄절을 보냈는지, 몇일 전 성탄절은 지났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생각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2천년 전 아기 예수는 가난하고 소외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 오셨다. 이 곳은 역사의 현장이며, 예수님의 생활현장이었다. 이곳에서 에수님은 이들에게 하나님나라를 선포하고, 이들과 함께 하나님나라 운동을 벌였다. 그리고 이들에게 평화를 가져다가 주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 한복판에 오셨다. 무엇보다 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함께 불의한 권력에 맞섰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는 그렇지 못하다. 교회는 분명 예수님이 세우셨다. 그리고 예수님이 계신 곳이 교회이다. 그래서 역사학자인 은준관 박사는 농어촌교회가 가장 모범적인 교회라고 했다. 그리고 한국교회를 향해 그리스도인들은 그곳으로 가라고 했다.

이 말은 한국교회의 선교가 가난하고, 소외되고, 고통당하고, 떠돌이, 창녀, 병신 등 처절한 곳에서 예수님은 하나님나라 운동을 벌였다는 말로 해석된다. 2019년 성탄의 계절에 한국교회는 어디에 있었는가. 다툼의 현장, 분열의 현장, 가진 자들의 주변에 있지 않았는가? 이러한 모습으로 한국교회는 아기예수의 탄생을 즐거워하며, 교회마다 성탄예배를 드렸다. 아기예수는 인류의 역사 속에 새로운 미래를 열었다.

닫힌 인류사회에서 인류의 역사를 열고 새로운 나라, 새로운 삶을 인류에게 가져다가 주었다. 전쟁과 갈등으로 인해 파괴된 인류에게 평화를 선포하셨다. 닫힌 인류사회가 소통하며, 미래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는데, 그 중심에 예수님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한국교회가 아기예수 탄생의 의미에서 이탈해 있었다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새로운 역사를 거부했다. 이스라엘은 다윗문화에 길들여진 나머지 ‘신’을 호화로운 성전에 가두어 버렸다. 그리고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며, ‘돈’을 ‘신’으로 대치시켰다.

오늘날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모습도 다르지 않다. 분명 틀에 박힌 생활을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미래가 열리지 않는다. 중세교회를 닮아가는 한국교회, 예수님을 성전예수로 만들어 버리는 한국교회는 예수님의 새로운 미래를 열 수 없다. 권력과 결탁해 부자들을 위한 교회로 변한 한국교회에 새로운 미래를 기대한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빠져 나가는 것보다 어렵다. 불의와 거짓의 토대 위에서 사는 인간들의 삶속에서 메시아를 발견할 수 없듯이, 불의한 정치지도자를 대변하고, 생명의 가치를 잃어버린 한국교회에는 메시아가 없었다. 그래서 어느 대학의 교수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맑은 귀와 볼 수 있는 맑은 눈을 가지라”고 했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는 인간이 만든 교리와 제도, 그리고 관념에 사로잡혀,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불의와 결탁해 불의한자들, 권세자들, 가진자들의 눈물을 닦아주기에 바뻤다. 2020년 새해를 맞는 한국교회는 교회 안에 갇힌 예수님을 세상 밖으로 불러내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자.

예장 통합피어선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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