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꿈을 가지고 산다.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고 했다. 2020 새해를 맞았다. 모두가 원대한 꿈을 가지고, 미래를 설계할 것이다. 사람은 자신 스스로 이루려는 꿈과 밖으로부터 오는 꿈이 있다. 이러한 꿈이 없으면, 사람은 허무하다. 대한민국이 청소년 자살률이 세계에서 제일 높다는 통계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늘 꿈보다도, 자신의 능력으로 꿈을 꾸고, 실현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의 꿈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꿈이 조화를 이루어야 희망을 가질 수 있다. 그래서 꿈을 노래하는 시인들은 “하나님께 꿈을 빌어보자”고 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꿈은 계시적이다. 그런데도 인간은 자신의 꿈을 바꾸는데 매우 인색하다. 계시적인 꿈은 항상 자신과 직결되어 있다. 자신의 꿈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세상을 향한 꿈이 없다. 이런 꿈은 자신 안에 갇혀 있다. 이웃을 향한 참사랑과 정의가 실종되었다.

자신 안에 갇힌 꿈은 돈을 벌어 자신만 잘살면 된다. 타인이야 어떻게 되던 자신만 잘되면 그만이다. 그래서 성서에 나타난 꿈을 꾸는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의 초월적인 꿈을 생각했고, 꿈을 꾸었다. 그것은 정의의 꿈이었다. 이웃과 함께 하나님나라를 일구는 참사랑의 꿈이었다. 내일이 없는 사람은 믿음이 없다. 하나님께 기도를 해도, 자신 안에 매몰되어 있다. 허공을 치는 기도만 해 된다.

먹고 살기 위해서, 독립운동을 벌이기 위해서 소련으로 건너간 고려인들은 스탈린의 이주정책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건너갔다. 당시 고려인들은 근면 성실했다. 원주민들로부터 신뢰를 얻었다. 이들은 나만을 위해서 살지 않았다. 나만을 위한 꿈을 꾸지 않았다. 가난하지만 꿈을 가지고, 원주민들과 더불어 살았다. 중앙아시아의 원주민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그렇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 앗시리아, 페르시아, 로마 등의 침략을 받으면서, 한번도 하나님나라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메시야 사상을 가지고, 미래 하나님나라에 대한 희망의 꿈을 꾸었다. 분명 성서의 하나님은 인간이 배신하면, 토라졌다가도 새로운 방법으로 인간의 마음을 달랜다. 인간은 이런 사랑의 하나님과 담을 쌓는다. 하나님은 담을 허무는데, 인간은 죄악에 사로잡혀 자신의 성을 쌓고, 탐욕의 바벨탑을 쌓는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넓은 땅을 주신다고 약속하는데, 인간은 하나님을 성전에 가두어 버렸다. 그래서 성전 하나님을 밖으로 불러내, 내재적인 신앙의 꿈을 꾸자고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고 이 땅에 오셨다. 나귀는 평화의 상징이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다. 약한 자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강한 자들과 대적했다. 예수님의 삶의 현장은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이었다.

오늘 세계와 분단된 우리민족은 불안하다. 한국교회의 일부 보수적인 목회자와 교인들은 북한이 핵을 개발했으니, 남한도 핵을 개발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것도 평화(샬롬)을 노래해야 할 목회자가 ‘로마평화(팍스)’를 말하고 있으니, 한마디로 참담하다. 이런 그리스리스도인에게 정의와 참사랑의 꿈이 있겠는가. 그리스도인들은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소망을 가져야 한다. 꿈을 가져야 한다. 서로 돕고 위로하는 하나님나라를 이 땅에 건설해야 한다.

새해에는 이런 나라가 오기를 소망해 본다.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하는 사람을 위해서 일하셨다. 내가 이루겠다고 허세를 부리는 꿈은 소망이 없다. 여기에는 정의도, 참사랑도 없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는 사람은 완악 할 수밖에 없다. 우리 모두 평화의 왕, 예수 그리스도의 꿈을 꾸자. 나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꿈은 한 순간에 날아가 버린다는 것을 잊지 말자.  

예장 호헌 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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