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 사 랑 목사

박재순 교수는 자신의 저서 <예수운동과 밥상공동체>(1988, 도서출판 천지)에서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맑은 귀와 볼 수 있는 맑은 눈을 가지라”고 했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는 인간이 만든 교리와 제도, 관념에 갇혀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우려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 한국교회의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자리중심적인 삶 때문에 하나님의 참사랑을 실현하지 못하고 있다.

불의와 결탁해 자유인들을 결박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자유인에게는 법이 필요하지 않다. 가기중심적으로 살면서, 바리새적이며, 유대인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법이 필요하다. 이스라엘 민족이 파라오의 압제 밑에서 해방돼, 일월신을 섬기며, 부모를 배반하고, 어린아이를 불사르는 등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본 하나님은 이들에게 율법을 내려주셨다. 선한 삶을 사는 자유인에게는 율법이 필요 없다.

그 만큼 예수님의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는 맑은 귀를 가진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거룩한 주님을 볼 수 있는 눈도 갖지를 못했다. 주님의 뜻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라도 그리스도인 모두는 자신의 자세를 가다듬고, 낮추어야 한다. 2천년 전 만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가난하고 소외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 자신의 삶의 현장이었다. 이곳에서 이들에게 하나님나라를 선포하고, 이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이셨다.

그리고 이들에게 평화를 가져다가 주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 한복판에 계셨다. 또한 예수님은 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함께 불의한 권력에 맞섰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는 그렇지 못하다. 교회는 분명 예수님이 세우셨다. 그리고 예수님이 계신 곳이 교회이다. 그래서 역사학자인 은준관 박사는 농촌교회가 가장 모범적인 교회라고 했다. 그리고 한국교회를 향해 그리스도인들은 그곳으로 가라고 했다.

이 말은 한국교회의 선교가 가난하고, 소외되고, 고통당하는 떠돌이, 창녀, 병신 등이 있는 처절한 곳에서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이라는 말로 해석된다. 그렇다면 오늘 한국교회는 어디에 있는가. 다툼의 현장, 분열의 현장, 가진 자들의 주변에 있지 않는가. 이러한 한국교회의 모습으로는 새로운 나라, 새로운 세상을 소망 할 수 없다. 예수님은 인류의 역사 속에 새로운 미래를 열었다.

닫힌 인류사회에서 인류의 역사를 열고 새로운 나라, 새로운 삶을 인류에게 가져다가 주었다. 전쟁과 갈등으로 인해 파괴된 인류에게 평화를 선포하셨다. 닫힌 인류사회가 소통하며, 미래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는데도, 그 중심에 예수님이 있었다. 문제는 한국교회가 예수님의 삶의 현장서 이탈 했다는 것이다. 새로운 역사를 거부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다윗문화에 길들여진 나머지 ‘신’을 호화로운 성전에 가두어 버렸다.
그리고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며, ‘돈’을 ‘신’으로 대치시켰다. 오늘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아닌가. 틀에 박힌 생활을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미래가 열리지 않는다. 중세교회를 닮아가는 한국교회는 예수님의 새로운 미래를 열 수 없다. 권력과 결탁해 부자들을 위한 교회로 변한 한국교회에 새로운 미래를 기대한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빠져 나가는 것보다 어렵다.

불의와 거짓의 토대 위에서 사는 인간들의 삶속에서 메시아를 발견할 수 없듯이, 불의한 정치지도자를 대변하고, 생명의 가치를 잃어버린 한국교회에는 메시아가 없다.이 땅에 오신 메시야는 새로운 미래를 열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 하나님의 참사랑을 잃어버린 오늘 한국교회의 모습에서는 새로운 미래를 약속 받을 수 없다.

마라나타세기총 대표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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