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창 주 교수

모세는 바로의 추격을 피해 미디안에 피신하고 있었다. 이드로는 오갈 데 없는 떠돌이 모세를 거두어주며 양을 치게 했다. 이집트의 궁중에서 자란 모세에게 사막의 양치기란 무료한 일이었다. 날마다 다른 목초지를 찾아가는 약간의 변화는 있었지만 거의 똑같은 단순 반복이었다. 그날은 사막 서쪽 호렙 산으로 갔다. 불이 자작자작 타오르는 떨기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이따금씩 보던 장면이라 무심코 지났다. 그러나 금세 타올라 화르륵 재만 땅에 떨구더니 이날따라 불꽃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는 가던 길을 돌이켜 그 광경을 지켜본다. 그 꺼지지 않는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그 분은 모세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며 ‘신발’(לענ)을 벗으라고 명한다. 본문 ‘너알레이카’(ךילענ)는 ‘너의 신발,’ ‘your sandals’로 번역된다. 사막의 양치기에게 신발을 중요하다. 땅의 열기는 물론 가시나 날카로운 돌부리로부터 발을 보호한다. 재질은 신분에 따라 통가죽이나 파피루스 껍데기가 사용되고 발에 맞게 끈으로 동여맨다.<Lieber, Torah and Commentary, 328.> 고대 사회에서 대게는 맨발로 다니고 주로 중간층이나 상류층에서 신발을 신었다. 신발을 벗는 행위는 신성한 공간이나 권위자를 대할 때 요구된다(수 5:15). 성전에 들어가거나 상급자를 만나야한다면 먼지가 묻은 상태로 만날 수는 없을 것이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왕이나 윗사람을 만날 때 반드시 신발을 벗고 걸어가야 했다.<A. Erman, Ancient Egypt: A Sourcebook of their Writings, 226.> 이슬람 교인들은 지금도 성전에 들어가기 전에 신발을 벗고 동양인들도 신성한 장소에서 비슷한 예를 갖춘다. 사실 구약에서 제사장의 직무와 관련해 신발은 한 차례도 언급되지 않는다(출 28-29장을 보라). 그러나 모세가 하나님의 산에서 신발을 벗었던 것처럼 이스라엘의 제사장들도 성소에서 신발을 벗은 채로 예전을 집행하였다(전 5:1). 그 흔적은 현재 회당 예배에서 ‘제사장의 축복기도’를 선언하기 전에 제사장이 반드시 신발을 벗는 장면에서 찾을 수 있다. <Sarna, Exodus, 14.>

떨기나무 불꽃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동안 모세가 취한 유일한 동작은 그의 먼지 묻은 ‘신발’을 벗는 것이었다. 거룩하신 분 앞에서 자신을 내려놓는 행위다. 즉 신발 끈을 풀고 자신의 몸을 낮춤으로써 그 앞에서 예를 갖추는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 풍속에서 신발을 벗는 행위는 존경과 겸양의 상징이다. 실제로 모세와 같이 신발을 벗는 관습은 지금도 유대 사회에서 유지되고 있다. 곧 가족의 장례를 치른 후 일주일 동안 외부 활동을 중지하고 자신의 집에 머무는데 신발을 결코 신지 않는다. 또한 대속죄일, ‘욤 키푸르’는 스물 네 시간 동안 금식하는 유대교의 가장 중요한 날이다. 하루 종일 아무 것도 먹지 않은 채 용서를 빈다. 이날 역시 신발로 자신의 두 발을 가리거나 끈으로 묶지 않는다.

또 다른 관점에서 신발은 자아(ego)의 상징이 된다. 왜냐하면 가죽으로 발을 완전히 가리고 헐렁해지지 않도록 끈으로 다시 동여매는 것은 마치 사람의 자아가 얼마나 내면적이며 풀기 어려운 것인지 보여주기 때문이다. 신발을 신는 것은 여행을 떠나거나 하루 일과의 시작을 의미하듯 신발 끈을 조이는 것은 자신의 임무에 얽매이게 한다. 반대로 단단히 매듭지어진 신발 끈을 하나씩 푸는 과정과 신발을 벗는 행위는 자기부정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인 것이다. 거룩한 분 앞에서 자아를 감춘다고 해서 자신의 내면과 존재를 가릴 수 없다. 그러니 그 분 면전, 곧 신성한 장소에서 신발을 벗으라는 요청은 자연스럽다.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 에고에 갇히고 신발을 신는 순간 자신의 어젠다에 묶이게 된다. 신발은 두 짝이다. 한 켤레는 히브리어의 양수(dual)로 표현된다. 모세가 벗어야할 신발은 자연히 두 짝이다. 얼른 벗어 던질 수 있는 신발도 있으나 모세는 목동이었기에 신발을 풀고 벗는 데 잠간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양쪽 신발 끈과 신발을 하나씩 벗으면서 두 차례나 몸을 낮추게 된다. 거룩한 분의 임재 앞에서 발을 딛고 있는 흙까지 몸을 낮추고 자아를 부정하는 상징적인 행위다. 여기서 양수는 한 켤레의 신발을 가리키지만 두 짝이니 결국 몸을 두 번 구부리는 셈이다. 한 차례로는 충분하지 않다.

한신대 구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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