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 태 영 목사

정초가 되면 유대인은 가정에서 혹은 회당에서 전도서를 읽는 관습이 있다고 한다. 세상의 이치와 삶에 대해 성찰하기 위해서다. 그만큼 전도서는 인간의 ‘존재’와 ‘삶’에 대한 심오한 메시지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전도서 첫마디는 이렇게 시작한다.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 사람이 세상에서 아무리 수고한들 무슨 보람이 있는가”(전 1:1-2). 전도서는 이렇게 허무를 설교한다. 영원이라는 시간 앞에 잠시 살다 가는 인생의 허무함을 말한다. 인간이 자기를 자랑하고, 변치 않는 이름을 남기려 하고, 시간을 요리하여 불변의 존재가 되고자 하는 것들이 부질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전도자는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다”(전 3:1)며 ‘때’의 소중함, 피할 수 없는 한계, 수용하지 않을 수 없는 이치에 대해서 말한다. ‘때’를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인생을 살아가는 키워드이다. 물론 이 때는 크로노스적인 때가 아닌 카이로스적인 때이다.

전도서의 ‘때’에 대한 사상과 신앙에 의하면 첫째,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정해진 때를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다. 인간이 비록 영원을 사모할지라도 정해진 때에 귀속되어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분·초를 다투며 시간 경영을 말하지만 망상이다. 사람이 시간을 요리하는 게 아니라, 시간이 사람을 요리한다. 시간을 초월하여 영원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둘째, 정해진 ‘때’를 경험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첫걸음이기도 하다. ‘때’ 앞에서 인간은 고개 숙일 수밖에 없다. 서산에 지는 해를 누가 돌이킬 수 있는가. 죽을 ‘때’가 되었는데 누가 죽음을 거부할 수 있는가. 달이 차서 태어나는 아이를 어느 산모가 아직 준비가 덜 되었으니 잠시만 더 기다리라고 하겠는가. 그리하여 ‘때’를 자각하는 것은 ‘때’를 살아가는 자신을 자각하는 것이요, ‘때’를 자각한 사람만이 조물주를 우러러 볼 수 있다.

셋째, 우리에게 정해진 ‘때’는 언제나 상반성을 지닌다. ‘때’는 좋은 일만 있는 게 아니다. 좋은 일 한편에는 반드시 안 좋은 일이 있다. 해산의 기쁨은 해산의 진통을 수반한다. 풍요로움은 땀의 결실이다. 큰 뜻에는 고난과 역경이 따른다. 그리하여 전도서는 비록 안 좋은 일일지라도 삶의 단면으로 수용하라고 한다. 잠언의 말씀대로 수고로운 인생일지라도 “사는 동안 기뻐하며 선을 행해야” 한다. 지금 “먹고 마시고 수고함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아야 한다. 새해를 맞이했다. 예수께서는 “새 옷을 찢어 낡은 옷을 꿰매는 자가 없다”(눅 5:36)고 하셨다. 근심 걱정 불안 의심은 내일이라는 새 옷을 찢어 오늘이라는 낡은 옷을 꿰매는 행위이다. 오늘의 삶을 긍정하고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야말로 내일을 풍요롭게 한다.

삼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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