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레를 위하여

걸레와 함께 구석구석 먼지를 닦아내다 보면
서서히 땀이 나며
무릎을 꿇은 겸허가 만족스러워집니다.
어느 누구와도 함께 하지 못했던 평화를
누립니다.

그런 친구와 잠시 헤어질 때의 예의는
깨끗이 빨아놓는 것입니다.
걸레가 바닥에 놓여 있을 때
다른 식구가
손이 아닌 발로 잡는 것을 막기 위해서죠.

그러니 전능하신 당신께서는
저를 부디 걸레로 써주시되
더러운 곳을 닦는 걸레로 써주시되
하루 일과가 끝나면
깨끗이 빨아주기는 하소서.

 

▲ 문 현 미 시인
홀로 높으신 한 분께서 가장 낮은 곳으로 임하심에 감사하는 시간이다. 죄로 얼룩진 인간을 살리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매달리신 그분의 은혜에 깊이 감사하는 시간이다. 이런 감사가 밀려오는 때에 은은한 울림이 있는 시를 마주하니 기쁨이 차오른다. 시의 제목이 ‘걸레를 위하여’라니 저절로 관심이 집중된다. 지금까지 어느 시인도 장시인처럼 걸레를 대상으로 이렇게 예의를 갖춘 적이 없다. 살면서 걸레를 손에 안 잡아본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시인은 일상에서 흔히 보는 걸레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걸레로 구석의 먼지를 닦다가 “무릎을 꿇은 겸허”에 만족하고 “어느 누구와도 함께 하지 못했던 평화”를 누리다니 성찰의 깊이가 느껴진다.

걸레를 시적 대상으로 했다는 것 자체가 특이하지만 걸레를 친구에 비유할 만큼 낮고 천한 것에 대한 시선이 경이롭기까지 하다. 자신의 삶을 얼마나 돌아보아야 이런 반성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을까. 시적 화자는 “친구와 헤어질 때의 예의는” 깨끗하게 빨아놓는 것이고 그 이유는 걸레를 “발로 잡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한다. 대상에 대한 깊고도 섬세한 마음에 무현금이 켜진다. 신실한 믿음에서 비롯된 깊이 있는 사유와 예리한 감각이 돌올하다.

마지막 연에 이르면 “전능하신 당신”께 간구하는 화자가 나타난다. 자신을 “더러운 곳을 닦는” 걸레로 써 달라는 기도와 함께 영혼을 정화해 달라는 “깨끗이 빨아주기는 하소서”의 시행으로 끝맺는다. 장시인을 “무수한 타자들과의 수평적 공존을 꿈꾸는 존재”라고 한 비평가의 명명은 조금도 빗나감이 없다. 타자인 걸레와의 공존, 더 나아가 걸레에 대한 예의와 배려를 통해 낮은 곳으로 임하는 삶의 진경을 체감한다. 그런 기도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는 새해이다.

백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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