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 태 영 목사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 예루살렘성전으로 향하던 사람들 중 일부가 발길을 돌려 마가의 다락방으로 모여들었다. 집단적인 기억의 심장인 성전을 뒤로하고, 일상의 삶의 공간으로 모여든 것이다. 누가는 이 장면을 예리하게 포착했다. 예루살렘성전에 집중되었던 소망과 기대가 일상의 삶의 공간으로 옮겨진 것이다. 여기에 성령 사건의 혁명적 폭발성이 내재되어 있다. 비록 성전처럼 성별된 처소가 아닌 일상의 삶의 공간임에도, 하나님을 향한 구원의 갈망이 있고, 불타는 열망이 있고, 가슴 찢는 통회의 눈물이 있다면, 바로 그곳에 거룩한 영이 임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기억’의 시작 즉 복음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전까지 하나님의 영은 예언자를 통해서 말해졌고, 제사장을 통해서 보증되었으며, 성전 제도라고 하는 권위에 의해서만 공인 되었다. 그런 거룩한 영이 성전이 아닌 마가의 다락방에서, 그것도 개개인 위에 임한 것이다. 성령의 역사가 성전제도라는 집단적 기억에 대한 반동의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처음에 사람들은 ‘저들이 술에 취했다’는 정도로 가볍게 여겼다.

그러나 그게 아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놀라운 반동을 보여준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6).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윗은 장차 오실 메시아의 원형으로 기억된 존재다. 그런데 베드로의 설교는 백성들의 집단적 기억체인 메시아로서의 다윗을 부정하고,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를 메시아로 선포한 것이다. 베드로의 설교가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켰을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이렇게 성령의 역사는 새로운 기억의 시작으로 우리를 불러낸다. 견고한 인습과 집단적 기억에 대한 반동으로.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를 향해 우리를 불러낸다.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이스라엘의 집단적 기억을 깨뜨리신 분이다. 율법학자들, 바리새인들을 ‘위선자’(눅 20:45-47)로 지목한 것을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예수께서는 저들을 집단적인 기억체인 성전과 율법으로 사욕을 취하면서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역사를 가로막는 자들로 보신 것이다. 나라의 안보를 이용하여 사익을 취하는 자들, 딴은 나라를 걱정하면서 과부의 가산이나 탈취하는 자들과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집단적 기억에 대한 반동,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이다.

삼일교회 담임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