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승자목사
산길을 가다가 호랑이를 만난 소녀의 이야기는, 오늘을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이 소녀는 호랑이 앞에서 눈을 감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호랑이의 마음을 돌이키시사 부드럽게 하시고, 사람을 보면 사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소녀가 간절한 기도를 드리고 눈을 뜨니 호랑이도 기도하고 있었다. 이 소녀는 너무나 반가웠다. 감사해서 하나님께 또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제 기도를 들어 주셨군요.  포악한 호랑이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셔서 인간처럼 기도하게 하셨군요. 감사합니다. 오 나의 하나님”

 절박한 상황에서 당황하지 않고, 호들갑을 떠는 소녀의 모습을 본 호랑이도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난 방금 너를 포식할 새각에 가스이 뛰어 식사 기도를 했다. 그런데 너는 무엇이 그리 기뻐서 눈물까지 흘리느냐(?) 자살을 못해 안달 할 일이라도 생겼느냐”

 우리의 기도는 때로 엉뚱하게 응답되는 경우가 있다. 분명한 것은 교인이라면 누구나 하나니을 향해 간구해야 한다. 그것은 성서가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으며,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부여된 특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명령하셨다. 또 성령과 능력을 받기 위해서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비롯하여 선지자, 사사, 지도자들을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며,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 “그 때에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 4:26) 시인 존 밀턴도 <실락원>에서 아담과 이브를 달래서 주 앞에 회개하자고 충고하는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셨던 곳으로 가서/그의 앞에 머리를 숙이고/우리가 넘어져 타락한 것을 회개합시다/그의 앞에 겸손히/우리의 잘못을 고백하고/눈물을 땅에 적시며/우리의 탄식으로 대기를 채우며/용서를 수하는 일 이외에/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소”

 아브라함도 조카 룻을 생각하며, 도고의 기도를 이렇게 드렸다.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그 성중에 의인 50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그 50의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까”

 야곱도 기도했다. 시인 샤프는 야곱의 기도문을 정리한 그대로를 옮겨 놓았다.

 “주여 내가 밤세워 씨름하였나이다/내게서 떠나지 마옵소서/슬픔에 지치고 곤궁 속에 헤매다/마음 상한 나를 그냥 버려두지 마옵소서/…(중략)…/오 주여 나를 도우소서/나는 의로운 사람이로소이다”
 모세도 기도했다. 

 “슬프도소이다/이 백성이 자기를 위하여/금신을 만들었습니다/이보다 큰 죄가 없습니다/그러나 주여! 합의하시면/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그렇지 아니하시면 주여!/원컨제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시옵소서”

 시편은 그 자체가 기도시로 이루어졌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상에서 절박한 기도를 드렸다.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 사람의 기도였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어째서 나를 돕지 않으시고/나의 신음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시나이까/…(중략)…/하나밖에 없는 이 소중한 생명을/개와 같은 저 원수의 세력에서/구해 주소서” /햇불중앙교회 담임·충주국제금식기도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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