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재 성 교수

츠빙글리와 취리히 세속정부가 종교개혁으로 변화하는 결정적인 시기가 몇 가지 단계로 진행되었다. 1520년 7월 15일부터 츠빙글리는 프란시스코파 설교자 프란츠 램버트와 성경해석과 설교에 대해서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그 결과로 취리히 시의회는 오직 성경에 합당한 설교만을 허용하기로 결정했는데, 여전히 로마 가톨릭에 속한 자들도 있었다. 그래서 1521년 여름에 취리히는 교황을 지키기 위해서 이탈리아의 파르마와 피아센자로 군대를 파견했다. 이 전쟁은 취리히가 마지막으로 용병을 파송한 것이다. 그러나 1522년 1월 11일에 더 이상은 결코 용병을 파송하지 않겠다고 결정을 내렸다. 츠빙글리는 스위스 젊은이들을 고용해서 그들의 피를 팔아서 이득을 챙기는 추기경들을 “늑대들”이라고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성경적인 설교를 통해서 츠빙글리가 미사제도를 폐지하자고 주장하고, 면죄부를 공격하며, 성인들과 성상숭배를 철폐를 단행하고, 스콜라주의 신학을 비판하자 취리히 시민들은 찬반양론으로 나눠졌다. 제기된 교회 개혁의 모든 사안들에 대해서 성경에 따라서만 판단해야한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지기까지의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처음에는 츠빙글리가 용병제도를 반대하는 설교를 하더라도, 세속정부는 용병파송을 지속한다는 결정을 했었다.

츠빙글리의 성경적 설교사역이 진행되면서, 1522년 7월, 취리히 시의회는 공식적으로 종교개혁을 받아들이기로 허락하기에 이르렀다. 흑사병에 걸려서 죽음 직전까지 이르렀다가 회복한 츠빙글리는 개인적으로나 신학적으로나 한결 성숙해졌다. 여전히 교회와 성경 중에서 최종 권위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지속되었다. 1523년 1월 29일, 취리히 시청에서는 양측의 공개토론이 개최되었다. 복잡한 상황을 수습하고자 츠빙글리는 “67개 조항”을 작성 제출했는데, 성경의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권위를 강조하면서, 교황, 미사, 선행을 통한 구원, 성인들의 중보, 수도원제도, 성직자의 독신주의, 고해성사, 연옥을 모두 다 반대하였다. 1523년 10월에 츠빙글리의 신학과 설교가 성경적이라는 취리히 시의회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스위스 종교개혁자들이 성경을 근거로 삼는 교회의 개혁을 성취하지 않았더라면, 각 지역마다 나눠 갖고 있었던 법적인 결정사항들을 하나로 묶어낼 수 있는 국가적 통합 원칙들을 제정할 수 없었다. 각각의 칸톤들은 독립적으로 결정하여 나가는 자치권을 행사하면서도, 주변의 도시들과 지역들에게 연대를 추구하고 있었다. 취리히의 결정은 콘스탄스, 울름, 프랑크푸르트, 아우구스부르그, 린다우, 멤잉겐, 스트라스부르그, 베른, 바젤, 제네바 등으로 전파되어나갔다. 츠빙글리의 영향은 제네바에까지 전달되어서 1535년에 개혁신앙을 받아들였고, 칼빈의 개혁신학으로 발전하게 되는 터전을 제공하였다.

개혁교회 진영은 본질적으로 급속하게 경제적인 성장을 하는 네 개의 도시들을 (취리히, 바젤, 베른, 샤프하우젠) 중심으로 하는 칸톤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계속>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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