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만세운동 한국교회는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서 예수님의 비폭력 평화운동, 하나님나라운동에 동참해야 한다.

3.1정신서 이탈한 보수적인 그리스도인

3.1만세운동이 일어난 지도 100년을 넘어 101주년이 됐다. 지난 1년 한국교회는 3.1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아 대대적인 행사를 갖고, 3.1정신을 이어받아 한반도의 평화와 한민족의 화해, 그리고 인류사회의 번영을 위해서 봉사 할 것을 다짐했다. 그럼에도 보수적인 한국교회의 일부 목회자와 교인은 친일적인 발언을 쏟아내며, 진영싸움을 부추겼다. 일본 아베의 경제보복에 맞서 싸우는 국민들을 실망시켰다.

어느 교회의 권사는 일본 아베의 경제보복에 맞서 싸우는 국민들을 아랑곳하지를 않고, 일본 대사관 앞에서 “아베님 사죄드린다”고 말했다가 국민의 몰매를 맞았다. 전 국회의원이며, 보수적인 교회의 교인인 송모 의원은 보수적인 기독교 행사에서 일본군에게 순결을 빼앗기고, 시궁창만도 못한 삶을 산 위안부 할머니들을 향해 “돈을 벌기위해 일본 매춘부를 자원했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이 권사와 이 의원이 출석하는 교회의 담임 목사 역시 보수적인 인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해서 송모 의원과 똑같은 막말을 쏟아냈다.

이 자리에 모인 보수적인 인사들은 ‘아멘’으로 화답했다. 그 목사에 그 교인이라는 말은 이 때 쓰는 모양이다. 막말을 쏟아내는 목사가 담임한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에게서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이들은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서, 하나님나라를 선포하고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인 예수님의 역사의 현장서 이탈한 것은 분명하다. 이들에게서 어떻게 선한 것을 기대 할 수 있겠는가.

이들은 진영논리를 내세워 매일 청와대 앞에서 ‘대통령 하야’을 외쳤다. 관념에 사로잡혀 진보적인 대통령을 인정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국회에서 ‘기도’로 나라를 세웠다는 것을 즐기차게 외치며, 북한과 어떠한 경우에서든지 화해하고, 대화 할 수 없다는 주장을 펼쳤다. 한마디로 이들은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워 로마평화를 외쳤다. 그러면서 “일본과 대화하라”고 촉구했다. 같은 한민족과 화해 할 수 없는데, 어떻게 일본과 화해 할 수 있는가.

한마디로 이들에게서 예수님의 ‘샬롬’을 찾아 볼 수 없었다. 대한민국을 침략해 36년동안 식민통일을 한 일본과는 화해하라고 말하면서, 왜 같은 민족인 북한과는 화해하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인가. 거기에는 “북한 공산주의’는 무조건 싫다”는 관념이 작용했다. 한마디로 이들 보수적인 목사와 교인은 하나님나라에 혼자 가겠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남한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한다면, 하나님은 북한의 하나님이며, 세계민족의 하나님이 아닌가.

독일의 히틀러는 혼자 유대인 600만명을 학살하지 않았다. 유대인 600만명을 학살하는 데는 유럽의 기독교인들이 있었다. 이들의 머리에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은 죄인”이라는 관념이 지배하고 있었다. 이 관념이 유대인 600만명을 살해했다. 분명 하나님은 우리에게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주셨다. 과연 당시 유럽인들이 하나님나라운동에 충실했는가. 당시 유럽의 신학자들은 물었다.

유럽의 신학자들은 감옥에서 하나님 없는 하나님 앞에 서있는 죄인들을 보았다. 지금 대한민국의 국민들 역시 하나님 없는 하나님 앞에 서 있다. 그것은 보수적인 목사가 하나님을 죽여 버렸기 때문이다. 이 목사와 이 목사를 추종하는 교인과 목사들은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과 다르면 무조건 ‘빨갱이 주사파’로 규정해 비난하기에 바쁘다. 여기에다 진영싸움을 멈추고, 예수님의 샬롬을 외치는 동역자들도 주사파 빨갱이로 매도해 버린다.

이것은 분명 성서에서 이탈한 것이며, 3.1운동의 정신이 아니다. 3.1운동은 한민족의 독립운동이며, 민족운동이다. 또한 예수님의 비폭력 평화운동이다. 오늘 한국교회는 고난당하는 민족을 위해서 무엇을 했는가. 일제 식민지 아래서 고난당한 한민족과 일본 아베의 경제보복에 맞서 싸우는 국민들을 향해 막말을 쏟아내는 것이 3.1정신을 이어받아 한민족과 인류를 위해서 봉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새로운 나라를 갈망한 한민족의 독립운동

지난해 일본 아베는 대한민국을 향해 경제보복을 단행하더니, 이번에는 “코로나19‘를 내세워 한국인들에 대한 입국 제한 강화 조치를 취했다. 우리 정부도 여기에 맞서 상호주의에 대응을 예고했다. 청와대는 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회를 열고 일본정부가 사전 협의 없이 부당한 조치를 취해 납득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밝히고, 상호주의에 입각해 필요한 조치를 포함한 대응방안을 검토키로 했다.

일본 아베정부는, 한국을 향한 강경한 대응을 통해 자신들의 정권을 유지하려는 속셈을 그대로 드러냈다. 명분은 ‘코로나19’로부터 자국민을 보호하겠다는 것이지만, 아베의 속셈은 떨어지는 자신의 지지도를 끌어 올리고, 도쿄올림픽을 예정대로 강행하겠다는 속셈이다. 일본과 대한민국은 분명 다르다. 대한민국은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민주화된 나라이다. 그래서 숨길 수도 없다. 모든 것이 투명하다.

일본은 그렇지 않다. 국가주의이다. 그래서 모든 것을 지금까지 숨겨 왔고, 숨기고 있다. 이번 ‘코로나19’ 대응에서 일본은 국가주의 형태를 그대로 드러냈다. 3.1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은 대한민국 국민은 “독립운동은 못했어도, 일본상품 불매운동은 한다”며, 일본 아베정부의 경제보복에 맞서 싸웠다. 국민들이 일본 아베의 경제보복에 맞서 일본상품 불매운동 등을 벌이는데, 일부 정치인과 학자, 그리고 목회자들은 일본과 동맹 등을 내세워 초를 치지 않았는가.

이들은 대한민국의 국민이라고 말 할 수 없다. 국민들이 이런 정치인과 학자, 종교지도자들에게 희망을 걸겠는가. 3.1만세운동 100주년 넘어 101주년을 맞은 한국교회는 일본국가주의에 굴복하고, 신사참배에 대한 죄를 회개하지 않았다. 오히려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던 행동이다”고 변명하기에 바빴다. 그러면서 3.1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순교한 순교자와 신사참배를 반대했다가 순교한 목회자들을 실컷 우려먹는다. 침략국인 일본은 우리의 동맹도, 우방도 아니다.

3.1만세운동 당시 선교사들의 시각 또한 오늘의 일부 한국교회의 목회자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 그것은 미국 트럼프 대통령도 마찬가지이다. 미국의 선교사들은 3.1만세운동 당시 비무장으로 일제의 헌병과 경찰에 맞선 한국교회 교인들을 ‘폭도’로 매도하지 않았는가. 분명한 것은 3.1만세운동에 참여한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나라를 갈망한 기독여성, 기독농민, 기독학생들의 독립운동이며, 민족해방운동이 아닌가. 또한 3.1만세운동은 예수님의 비폭력 평화운동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야 한다. 그래야만 한국교회가 새로운 나라를 갈망하는 한민족에게 희망을 가져다가 줄 수 있다. 한국교회는 3.1만세운동 101주년을 맞아 새로운 각오로 민족에게 희망을 주는 교회로 거듭나야 한다. 그리고 천왕을 섬기는 일본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다는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이것이 3.1만세운동 101주년을 맞이한 한국교회에 던져주는 메시지가 아닌가.

글로벌 시대에 일본도 함께 살아야 할 이웃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분명한 것은 일본 아베가 우리에게 용서를 빌었을 때만 우리의 이웃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용서를 빌지 않는데 어떻게 함께 얼굴을 맞대고 살아갈 수 있는가. 일제에 청춘을 빼앗긴 이 땅의 소녀들과 청년들은 일본에게 돈을 달라고 하지 않았다. 용서를 빌라고 했다. 용서를 빌지 않는데 어떻게 일본 아베를 용서 할 수 있겠는가.

3.1만세운동이 끝날 무렵 조선반도에 큰 사건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교회의 지식인들이 이탈해 공산당 창당에 참여했고, 다른 하나는 남산에 일본 신사가 세워졌다. 여기에 대해서 한국교회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 여파는 한국교회가 신사참배를 결의, 하나님을 배신하는 배교를 결행하게 했다.

일본 군국주의 부활을 경계하자

3.1만세운동 100년을 지난 101주년을 맞은 한국교회는, 천왕을 섬기는 일본은 하나님의 공의 앞에 무릎을 꿇는다는 진리를 깨닫고, 일본 아베의 경제보복과 ‘코로나19’로 인해 곤궁한 삶을 살고 있는 국민들에게 새로운 나라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 또한 신사참배가 국민의례로 해석하고, 황국신민으로 당연한 의무임을 강조한 한국교회는 먼저 회개하자. 그리고 영미의 교파주의를 그대로 받아들여 분열과 갈등을 일삼은 잘못도 회개하자.

영미교회의 DNA를 그대로 받아들인 한국교회는 과거나, 지금이나 권력의 주변을 맴돌며, 온갖 혜택을 누려오지 않았는가. 이런 한국교회가 하나님보다 맘몬과 바벨을 숭상하며, 예수님을 호화로운 교회당, 시멘트 건물 속으로 불러들이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이제라도 교회는 예수님이 계신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 3.1만세운동 당시 기독교인들이 민족의 아픔이 있던 곳으로 나갔듯이 말이다.

이제라도 한국교회는 예수님의 시간과 공간인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곳은 분단의 현장이 아닌가(?) 그 곳에 교회를 세우고, 한반도의 평화와 한민족의 화해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 친일파는 한일합방 이전부터 있었으며, 지금도 친일파의 활동은 멈추지를 않고 있다.

일본군국주의 부활과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정신대문제 등이 표면으로 떠오르고 있는데도, 친일세력들의 참담하고 쓰레기 같은 막말은 계속되고 있다. 또한 3.1만세운동을 주도한 애국자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이 땅의 도로에는 일본차들이 거리를 질주하고 있다. 여기에다 요즘 일고 있는 일본의 패권주의와 군국주의 부활은 아시아는 물론, 세계의 평화질서를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다가 주지나 않을까 히는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식민지세력에 의해 끌려간 정신대 할머니들의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일본 우경화의 바람은 대한민국을 향한 또 하나의 침략리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오늘 대한민국 기독교 목회자와 교인들의 입에서 정신대로 끌려갔던 할머니들을 향해 내뱉는 막말은, 한마디 한심스럽다.

일본 아베의 경제침략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드리는 인사도 있다. 모 교단의 총회장을 지낸 한 목사는 대중 집회에서 “일제시대 정신대로 끌려갔던 소녀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 자원했다”고 막말을 했다. 이에 300여명의 목사와 교인들은 ‘아멘’으로 화답했다. 한국교회의 교인과 목사의 역사의식이 이 정도라면, 이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이 바로 한국기독교의 목회자이며, 교인이라는데 부끄럽다.

누가 이렇게 막말을 내뱉고, 여기에 동조하는 교인들을 보고 교회에 나가겠는가(?) 오늘 한국교회 교인들의 이탈은 당연하다. 일제 36년동안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해 희생당한 애국자들의 ‘한의 소리’가 하늘에 사무치는데 이들의 한을 누가 달래주겠는가. 영화 <귀향>을 보라. 오죽하면, 살아 돌아온 정신대 할머니가 교회를 찾아가지 않고, 무당을 찾아가 동무의 한을 풀어달라고 했겠는가(?) 그 대답은 한국기독교 목사와 교인들의 행동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영화에서는 진정한 한의 사제는 목사도, 스님도, 신부도 아니었다. 진정한 한의 사제는 무당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 한국교회 목사와 교인들은 영화 <귀향>을 좌편향 영화라고 매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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