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숨는다

나는 산에 들고
산은 내게 들어
초여름 하룻밤을 달게 자는 줄 알았네.
 
장터에서 엿치기하다 개꿈 깨어 둘러보니
나는 객창 안에 있고
산은 객창 밖에 있네.
 
엿 구멍 재다 산 놓치는 줄 몰랐네.
산 들인 것부터가 개꿈이었네.
 
다시 산에 올라도
산을 들여도
산 홀로 산에 들어 꿈적도 않네.
 
무슨 꿈을 더 깨어야 산을 들이나.

*감태준 : 『시와함께』 편집인. 전 중앙대 교수.
          『월간』문학 등단, 윤동주 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 정 재 영 장로
제목을 보면 산이 숨는다 말하고 있다. 이 말은 산의 고정성을 파괴하고 이동성을 가진 주체적 인격존재로 표현되고 있다. 인류 공동 심리 안에는 산은 종교성을 지닌 대상으로 여겨왔다. 최소한 하늘과 연결되어 신과 가깝게 있다는 집단무의식이 있다.

첫 연은 산과의 혼연일체다. 존재양상으로 볼 때 물아일체사상이다. 또한 기독교 신앙으로 본다면 하나님과 혼연일체 된 즉 인간이 하나님께 귀의 하고, 인간 속에 임재하는 하나님과 일맥상통한다. 혼연일체는 초여름의 절기로 비유되는 안락의 상태다.

2 연에서는 그런 물아상태가 깨지는 이유를 말하고 있다. 장터란 보편적 삶의 상황을 지시한다. 즉 엿치기나 할 정도로 보이는, 어쩌면 하찮은 인간의 삶을 말한다. 종교적으로 보면 순수의 파괴나 분리를 뜻한다.
3연은 2연의 확장성을 보여준다. 애초 1연과 같은 혼연일체가 되는 것은 인간의 능동적 행위가 아니다. 산이 숨는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주체가 산이다.

4연은 회복의 상황이다. 회심이나 회개를 보여준다. 그래도 원상태의 회복은 불가하다함을 말하고 있다.
마지막 연에서 인간이 산으로 들어가고 싶어 해도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인간에게 있지 않고 산에게 있음을 보여준다. 물아일체의 주체는 인간이 아닌 산이다. 신과 인간의 일체로 본다면 신과 인간의 괴리를 보여주는데, 실존주의자 키에르 케고르의 절대 고독과 상통한다,

이 작품 구성은 산과 인간이라는 이질적이며 상반적인 두 존재로 되어있다. 신성함이나 고귀함을 상징하는 산과 장터에서 엿치기 정도나 하는 인간을 대비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둘 사이의 일체 현상은 융합시학에서 말하는 상반성의 융합을 말하려 함이다. 대부분 명시란 그런 구조로 이루어졌음을 이 작품이 재확인해주고 있다.

전 한국기독교시인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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