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재 성 교수

개혁교회 진영은 본질적으로 급속하게 경제적인 성장을 하는 네 개의 도시들을 (취리히, 바젤, 베른, 샤프하우젠) 중심으로 하는 칸톤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츠빙글리주의가 확산되는 것에 대해 위협을 느껴 보수적인 로마 가톨릭에 가담한 다섯 개의 도시들인 농촌지방들 (루체른, 슈비츠, 운터발덴, 추크, 우리, 프리부르크)은 합스부르그 왕가의 오스트리아와 1529년 동맹을 맺었다. 슈비츠에서 츠빙글리파 설교자가 이단으로 처형된 사건 때문에, 1531년에 두 번째 카펠 전투가 벌어졌고, 취리히의 개신교 진영이 패배하자, 츠빙글리의 꿈이 무산되는 것처럼 보였다. 취리히와 브렘가르텐이 포함된 아르가우 지방은 다시 로마 가톨릭으로 회귀했다. 불링거와 다른 두 명의 목회자들도 역시 추방당했다. 다음 해가 되면서, 스위스는 츠빙글리를 지지하는 개혁주의 진영과 로마 가톨릭에 지속적으로 연대의식을 갖고 있는 칸톤들이 정면으로 대립하였다.
 
취리히를 포함하여, 종교개혁 진영으로 자신들의 입장을 정리한 도시들에서도, 교회의 주요 사항들은 모두 다 시정부, 귀족 정치가들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취리히에서는 츠빙글리의 제자로서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교수이던 토마스 에라스투스가 제안한 바에 따라서, 교회의 출교권은 세속 정부의 통제 하에 있다고 받아들였다. 신앙고백서의 내용들, 목회자들의 활동사항, 교회의 권징, 교육, 교회재산의 관리 등 모든 결정들을 세속 정부가 주도적으로 그 지역 관내에 소관된 업무사항으로 다뤘다. 기독교 공동체와의 교류를 통해서 추진했지만, 깊은 충격을 받은 칸톤들에서는 목회자들이 정기적으로 총회를 열고 교회의 독립성을 구현하고자 시도하였다. 세속 정부와 지방 시의회에서도 어느 정도까지 목회자의 자문사항을 용인할 것인가를 놓고서 거듭된 토론을 하였다. 취리히에서는 거의 사십 여년을 목회했던 불링거가 개인적인 설득력을 발휘해서 시정부에 자문하였다.

오늘날에는 교회의 성직자 임명이나 직분자들을 세우는 결정을 각 교회가 총회의 규정에 따라서 질서 있게 진행하고 있다. 이것은 오직 교회의 재량권에 속한 일이기에, 당연히 여기는 일이 되었다. 그러나 16세기 유럽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취리히, 바젤, 샤프하우젠, 베른 등 개혁진영에 합류한 칸톤에서는 시정부와 교회 사이 심각한 대립과 다툼이 끊이지를 않았다. 칼빈은 베른 시당국의 결정에 대해서 번번이 반대하였다. 왜냐면 베른 시정부가 목회자들로 하여금 교회의 권징을 독자적으로 시행하도록 전혀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앙고백의 내용이라든가, 예배의 예전적 구성에 대해서도 다툼이 발생했다. 제네바에서는 1540년부터 칼빈이 독립권을 쟁취하고자 노력하였기에, 그 주변에서 큰 도시로 영향력을 행사하던 베른 시당국과의 사이에 민감한 대립을 지속하였다. 1558년에 이르게 되면서, 스위스 개혁진영 내에서는 취리히와 제네바가 가장 영향력 있는 교회로 두드러진 활약을 하였다.

츠빙글리의 서거 이후에, 취리히와 제네바의 종교개혁자들은 깊은 연대의식을 갖고 상호신뢰하면서 놀라운 협력을 이뤄냈다. 오늘날 세계 모든 개혁교회에 주는 교훈이 크다. 1549년에 불링거와 칼빈이 상호 존중의 정신에서 발표한 “협화신조” (Consensus Tigurinus)야말로 소중한 가치를 지닌 협력사역의 결과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독일 말부르크에서 모인 1529년의 회합 (Marburg Disputation)이 결렬된 이후에, 성만찬 신학의 차이는 크게 부각되었다.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계속>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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